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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May 20. 2019

얼마 전 내가 이모가 되었다

얼마 전 내가 이모가 되었다. 아직 이모가 되었다는 감격보다는 동생이 낳은 귀여운 생명체가 너무 작고 귀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동생이 조리원에서 집으로 온 다음날 병원 유리창 너머로 보던 아기를 안았을 때의 냄새도 새로웠다. 작은 몸으로 새근새근 숨 쉬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눈 코 입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얼굴, 방금 깐 달걀 같은 피부, 땀에 살짝 젖은 가는 머리숱까지 하나하나 보고 있으니 왠지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 같았다. 내 움직임에 온전히 몸을 맡긴 채 세상모르고 잠든 조카를 보면서 내 인생을 보다 밝게 만들어 줄 천사가 왔구나 싶었다. 조카의 이름은 정빈. 나는 수시로 “빈아”, “빈아”라고 부르면서 조카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우린 서로가 처음인 사람들이 아닌가. 내가 먼저 조카를 보았고 조카도 나를 이모라고 알게 될 그 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돌봐야 할 대상이 생기고 그 존재와 함께 자란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조카가 더듬더듬 말을 시작하고 걷기 시작하면 나는 또 어떤 방향으로 자라는 사람이 될지 궁금하다. 분명한 건 의식하지 않아도 함께 보낼 시간이 소중할 거라는 점이다.

아기를 보면서 비로소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늘 덜렁대고 정신없는 엄마가 할머니 노릇을 잘할까 싶었는데 빈이를 안고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나와 동생의 아기보기와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육아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나와 동생을 키워낸 사람이니 말이다. 이런 당연한 소리를 생소하게 할 정도로 엄마는 역시 엄마였다. 한쪽 팔에 아기를 착 안고 젖병을 물리는 모습은 새롭고도 대단해 보였다. 엄마는 우리가 아가였을 때 밤에 잠이 없어서 속을 썩였다고 놀리듯 이야기했다. 문득 나의 존재를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봤을 이십 대의 엄마가 그려졌다. 나는 엄마와 그렇게 강력한 끈으로 연결되어 먹고 잠들고 자랐을 것이다.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아도 느껴지는 온기가 엄마와 자식이라는 온도인가 보다.


부모 밑에 있을 때가 행복한 때라는 말은 사랑받을 때와 비슷한 말로 여겨진다. 부모는 어린 자식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신의 일로 여기고 그래서 자식은 사랑받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 나는 그런 때가 유년 시절이라고 생각한다. 아플 때 이마를 짚어주는 부드러운 엄마 손이 좋아서 아픈 게 싫지 않았다. 넓적하고 흰 엄마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워서 수박을 먹던 여름날도 좋았다. 자식이 평생 부모에게 잘해야 하는 이유를 따진다면 유년 시절의 기억이 흐릿하기 때문일 것이다. 키운 사람의 정성과 사랑을 자식은 다 알 수 없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조각조각 이어져 있다. 어린 시절 숨바꼭질을 할 때 멀리 가지도 못할 거리를 숨이 차게 뛰고 구석진 곳에 숨었을 때 느꼈던 안도감.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고요가 편안하면서도 동시에 친구가 날 찾으러 올 거라는 설렘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찰나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런 기억이 열리고 닫히는 시간이 이어지면서 사람은 성장하는 게 아닐까.  

부모의 돌봄이 필요한 시간을 무임승차하듯 지나왔다. 이젠 작은 생명 앞에 할머니가 된 엄마, 엄마가 된 동생, 이모가 된 내가 있다. 우리가 사랑한 시간은 모두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 셈이다. 인생이 지도 없는 불안한 여행길이라면 이젠 작고 귀여운 동행자가 생겼다. 나이 들어가는 게 그리 섭섭하지만은 않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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