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칸을 채우는 사람
“나는 ( )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거나 의문형으로 바꿀 때 빈칸에 들어갈 알맞은 말은 무엇일까. 보통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설명하기보다 이름, 나이, 직업, 사는 곳, 결혼 유무 등 사회에서 특정 짓는 하나의 표식으로 드러낼 때가 많다. 자신을 규정하는 여러 사회적 표식은 적당한 거리 두기와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화술이 되기도 하므로 유용할 때도 있다.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주문했다고 치자. 한 입 베어 물자마자 '이건 아보카도 샌드위치야'라고 하기 뭣하지 않은가. 빵과 여러 야채, 소스의 일도 있다. 반면 누군가 샌드위치를 궁금해 할 때 맛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을 필요 없이 “이것은 아보카도 샌드위치입니다”라고 하면 간단하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지 않더라도 사람을 알게 되는 과정도 비슷했다. 샌드위치의 이름은 빈칸을 채우는 간단한 표식인 셈이고, 맛은 겪어보고 알게 되는 무엇에 가깝다.
오랜 기간 꿈은 가까운 미래의 직업에 대한 질문처럼 여겨 왔고 꿈을 이룬다는 것은 어떤 직업 지위 연봉 등으로 대체되었다. 20대에는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잡지사 기자나 자유기고가와 같은 직업으로 표현했다. 어색했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내 쪽도 대충 둘러대기에 좋았다. 사람들은 약속한 듯이 유형화된 질문을 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글을 썼다. 정확히는 시를 썼다. 처음에는 여기저기서 상을 받는 재미에 더 열심히 했다. 그걸로 대학에도 갔으니 처음에 글쓰기는 괜찮은 시험 성적표 같은 거였다. 20대는 꿈에 대한 막연한 포부와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양심이 치열하게 혼재했다. 밥벌이는 보이지 않는 꿈보다 쉬웠다. 사회적 경력은 쌓여갔지만 꿈의 경력은 좀처럼 성과가 드러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시간이 흘러 직업으로서의 나는 매뉴얼적 인간일 뿐이고, 아무것도 아닌 글쓰기를 하는 내가 본연의 모습임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직업군에 있는 명칭으로 나를 소개하지만 그건 언제든 입고 벗을 수 있는 옷에 불과했다.
‘나’ 전문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야스토미 아유무의 「단단한 삶」에서는 ‘도道’의 개념을 ‘자신의 몸이 가르쳐 주는, 가야 하거나 성장해야 할 방향’이라고 전한다. 그래서 인생의 목적을 언어화하거나 인식하기는 어렵고, ‘꿈을 실현하는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명제를 던진다. 이것은 ‘꿈을 실현하는 과정에 의미가 있다’는 또 다른 명제로 이어진다. 그는 ‘문자화한 꿈’을 실현하자마자 맞닥뜨린 허무함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결국 ‘행복은 손에 넣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문장을 마주치면서 글 쓰는 직업을 가져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던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만약 일찌감치 직업으로서 글쓰기를 했다면 지금도 그런 삶을 살았을지 알 수 없다. 그동안 꿈이라는 단어가 너무 멀게 느껴져서 노력을 게을리 한 만큼 꿈에 빚을 진 기분으로 살았다. 다행히 좌절하는 날이 반복될수록 쓰고 싶다는 의지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애초에 꿈은 수고로움을 동반하지 않는다. 수고로움은 ‘일을 처리하기가 괴롭고 고되다’는 뜻이어서 행동으로 나타났을 때만 유효하다. ‘꿈을 꾼다’는 2 어절을 ‘글을 쓴다’로 바꾸는 일이 중요했다. 꿈을 행동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일로 정의하자 게으르고 추진력 없을 때의 나를 감시하는 또 다른 내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내 안의 감시자가 늘 객관적이지만은 않다. 잘 써지지 않아서, 생각이 나지 않아서, 경험이 많지 않은 것 같아서 등 온갖 핑계가 난무하지만 매일 쓰기 위해 노력한다. 매번 최고의 순간을 위한 전제조건은 없으니 꾸준히 읽고 생각한다. 꿈이라는 무거운 명사가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행동하는 이상 꿈의 방향 감각은 유지되었다. 그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만난 사람들, 자연, 책, 경험은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다.
역시 "나는 ( ) 사람입니다"의 빈칸에 들어갈 알맞은 말은 없다. 알맞은 말이 없다는 건 빈칸을 채울 수 있는 매뉴얼적인 인간도 없다는 사실이다. 일상이 거대한 샌드위치처럼 조여 오지만 그 와중에 꿈의 재료를 채워야 한다. 어떤 맛이 날지 기대하며 속을 채워나간다. 여기서 꿈의 재료는 특별하지 않다. 꾸준히 반복하는 일이다. 서둘러 어떤 샌드위치를 만들 거라고 단언하지 않고 나라는 재료를 충실히 채워간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만들어가는 시간이 중요하다. 빈칸을 채울 문자화된 표식은 만들어내면 그만이지만 쉽게 단언하지 않는다. 그 누구의 빈칸도 그렇다. 빈칸은 오히려 비어있을 때 더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