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의 사정>
도와주세요! 선생님!
영어가 서툴러 물어도 잘 대답하지 않던 내가 유치원에서 가장 크게 외쳤던 순간이야. 한 친구의 장난으로 깜깜한 창고에 갇혔거든. 멋진 보물이 있다며 다른 친구와 나를 마당의 하얀 컨테이너로 불렀어. 반짝이는 돌멩이에도 열광하는 어린애였기에 깜빡 속아 넘어갔지. 우리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바깥에서 문을 쾅 닫아버렸어. 아무리 밀고 당겨도 열리지 않아 온 힘을 다해 소리 질렀지. 곧 주변에 있던 선생님이 황급히 꺼내주면서 괜찮냐며 안아주었어. 심각한 잘못이 탄로 난 범인은 이미 자리를 피해 도망친 후였지.
그 친구를 만난 건 일주일에 절반만 가던 유치원을 매일 가게 되면서부터야. 곧 학교에 가야 해서 좀 더 이곳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고 부모님은 설명했어. 집에서 노는 게 제일 좋은 집돌이였지만, 친구들이랑 선생님과 어울리는 것도 충분히 좋아서 상관없었어. 그때 처음 나와 다른 반이었던 이 새로운 친구를 만났는데 다른 친구와 달랐어. 나처럼 아직 영어를 잘 못해서 말은 많지 않았는데 몸으로 표현을 강하게 하는 친구였어. 하고 싶은 놀이가 있거나 가지고 싶은 장난감이 있으면 물어보기보단 바로 행동으로 보여줬어. 유치원엔 여러 친구가 함께 있는 곳인데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움직이니 불편할 때가 많았어. 한 번은 계속 날 안고 넘어뜨리는 거야. 아프다고 하지 말라고 여러 번 하는데도 듣지 않더라고. 심각한 상황까지 흘러가서 결국 선생님을 불러야 했어. 어두운 공간에 아무도 모르게 남겨질 뻔했던 저번처럼 말이야.
나한테만 유독 그랬던 건 아니야. 모두에게 똑같이 막 대했어. 심지어 보살펴 주고 가르쳐주는 선생님께도. 그래서인지 곁에 머무는 친구가 적었어. 때론 외로웠는지 유치원에 가져오면 안 되는 본인의 장난감이나 강아지를 데리고 왔지. 지금 돌아보니 관심이 필요했었나 봐. 어떻게 친해지고 노는지 잘 몰라서 어긋났던 모양이야. 나도 못된 장난을 당하면 그 친구가 미워서 피하곤 했어. 괜히 내게 웃으며 다가오면 반갑기보단 걱정이 앞섰지. 졸업 후에 서로 다른 학교에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졌는데, 어디를 가도 비슷한 친구가 꼭 한 명씩 있더라. 어쩐지 전보다 훨씬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어. 나와 다른 사람과 지내는 법을 배우게 해 준 유치원 시절 그 친구 덕분인가 봐.
학교에는 나랑 생긴 것부터 다른 사람이 정말 많았어. 선생님도 친구도 눈이 대부분 파랗더라고. 가끔 나처럼 갈색도 있긴 했는데 많진 않았어. 그렇다고 특별히 주눅 들거나 위축되진 않았어. 집 밖에는 수없이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걸 직접 보고 느끼면서 적응해 갔거든. 날 소개할 때도 자신 있게 한국인을 드러냈어. 엄마 아빠가 준비해 주신 뻥튀기, 쌀과자, 유자차를 나눠주며 맛있고 즐겁게 한국을 알려줬어. 내 자기소개가 인상적이었는지 한 친구는 부모님께 자기 나라 간식을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싶다고 했다네. 그 친구 덕분에 맛있는 소시지를 얻어먹었지. 먹는 이야기 나온 김에 도시락 이야기도 좀 해 볼까. 생긴 것만큼 먹는 것도 참 다르더라고.
유치원부터 학교까지 계속 집에서 음식을 싸가고 있어.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만큼 원하고 필요한 음식이 다채로워서 한 가지를 제공하는 방식이 어렵나 봐. 먹으면 안 되는 걸 먹으면 몸이 아파지는 알레르기도 워낙 많아서 그렇다고 들었어. 처음엔 집에서 먹던 대로 한식으로 가져갔어. 나 말고는 대부분 빵, 샐러드, 샌드위치, 파이 같은 서양식이 많더라고. 너무 나만 다른가 싶어서 친구들과 메뉴를 맞춰서 싸달라고 했어. 그런데 정말 못 먹겠다 싶은 거 있지. 입맛에 맞지 않아서 자주 남겼어. 천천히 살펴보니 남이 뭘 먹든지 관심도 없더라고. 생각을 고쳐먹고 내가 좋아하는 걸로 다시 부탁했어. 이젠 밥만 싸가. 주먹밥, 삼각김밥, 김밥, 볶음밥, 덮밥, 계속 밥밥밥. 각자 다르게 맛나게 먹고 신나게 함께 노는 점심시간이 정말 좋아.
다르다고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할 순 없었어. 대화를 위해서는 새로운 말을 배워야 했지. 영어라는 건데, 내가 쓰던 한국말과는 참 다르더라고. 쉬워지기 전엔 다 어렵듯이 고생을 좀 했어. 처음 보는 남의 말을 익히는 게 어려웠던 게 아니고, 못 알아듣고 표현하지 못할 때 벌어지는 괴롭힘이 종종 있었거든. 아까도 말했잖아. 어디를 가도 남 못살게 구는 친구가 있다고. 아마 거의 영어를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할 때였을 거야. 줄을 서 있는데 일부러 뒤에서 밀고, 괜히 머리를 들이박는 녀석이 있었어. 나도 확 힘으로 부딪힐까 싶다가, 나보다도 작고 힘이 없어 보여서 참았지. 더 센 사람이 참는 거라고 엄마한테 들었거든. 조용히 손을 들고 선생님께 상황을 최대한 설명했어. 아무 말 못 한 채 당할 거라고 생각했었던 그 친구는 놀라서 그 뒤론 안 하더라고. 이런 일은 내가 말이 점점 늘면서 서서히 사라졌어.
영어로 말이 통하자, 난 입이 근질거렸어. 아직 말 안 했나? 내가 말장난을 정말 좋아하거든. 비슷한 소리인데 전혀 다른 뜻을 가지는 단어로 농담하는 걸 어려서부터 즐겼어. 과일 배를 떨어뜨리면서 배가 아파서 화장실을 가야겠다고 하는 거 말이야. 엄마는 아재 개그라고 아빠랑 같이 놀라고 하던데. 아무튼 새로운 언어의 세계에서도 내 스타일의 조크가 먹히는지 궁금했어. 열심히 궁리해서 시도해 봤는데 결과는 대성공. 어떤지 한 번 들어봐. 잠자는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이유가 뭘까? 바로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야. 잘 때는 누워서(lying) 자잖아. 거짓말하는(lying) 사람을 어떻게 믿냐고. 자, 다음! 죽어서 날뛰는 좀비가 집에 들이닥쳤을 때 집안 어디로 숨으면 살 수 있을까? 바로 거실(living room)로 가야 해. 죽은 자를 피하려면 살아있는 곳으로 가야지. 마지막이니 집중해 줘. 4월 1일 만우절에는 군인이 가장 힘들어. 왜일까? 3월(March) 내내 행진(march)했기 때문이야. 하하. 나만 웃은 건 아니지?
나랑 비슷한 사람들과 같은 음식을 먹으며 처음 배운 말로 살다가 모든 게 완전히 달라진 곳에 왔어. 마치 밤하늘의 불꽃놀이처럼 모양이나 빛깔이 서로 다르지. 그들이 내게 다르듯, 나도 그들에게 그럴 거야. 이런 다름이 한데 모여서 놀라운 광경을 만들어 내며 어울려 사는 재미를 알아가고 있어. 다르지만 통하는 면을 찾을 때의 즐거움과 몰랐던 세계를 깨닫는 기쁨은 특별하고 근사해. 어색하고 낯설어서 당황스러운 반응도 종종 마주치지만, 슬기롭게 대응하는 법도 천천히 배워가. 한국에 그대로 머물렀다면 어땠을까. 안 해봐서 모르지만 이처럼 강렬한 경험은 아니지 않았을까.
익숙한 장소에서 아는 밥만 먹던 내가 마음껏 다른 세상을 탐험할 수 있는 비밀은 가족이야. 이곳으로 오면서 유일하게 변치 않은 점이라 항상 든든해. 물론 아직도 아침에 학교 앞에서 엄마 아빠와 헤어지는 건 슬퍼. 제일 따뜻한 품을 떠나는 기분이거든. 그래도 예전처럼 학교에서 시간이 느리게 가진 않아. 가족이 보고 싶어지기 전에 학교 종이 울리더라고.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는 건 적응이 되었다는 말이지. 형형색색의 공간에서 놀고 배우다 보면 어느새 포근한 안식처로 돌아갈 순간이야. 오늘은 또 어떤 새로운 배움을 들려줄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바라볼 엄마와 아빠에게로. 이렇게 원래의 나를 간직하면서 색다른 체험을 거듭하며 살아가는 중이야. 알면 알수록 나와 다른 것들 천지인 넓은 이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