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의 사정>
간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할 때, 태어난 곳과 살아가는 곳의 반응은 확연히 갈렸어. 한국에서 알고 지낸 인연과 안부를 주고받다 내 근황을 전하면 순간 정적이 흘렀지. 어색한 중단을 느낄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에 조심히 이어지는 말은 언제나, "많이 힘들겠다." 그곳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테니 아마 당연한 걱정일지도 몰라. 안정적이고 대우받던 삶을 내팽개치고 떠나더니 겨우 한다는 일이 쯧쯧. 고생이 많다며 안쓰러움 가득한 목소리가 이어져. 동정받은 당사자가 오히려 당황해서 그런 거 아니라고 열심히 설명하지만, 혀를 끌끌 차는 수화기 저편에선 둘러대지 않아도 된다며 원치 않는 쓰다듬을 건네지. 이곳에 사는 사람이 들으면 기가 찰 상황인데, 참.
호주에서 오가며 만난 이들에게 간호 학생이라고 밝히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눈이 커져. 어려운 공부 한다며 대단하게 보는 눈빛을 느낄 수 있어. 실제로 이곳에선 전문직으로서 대접받고 처우도 좋아. 양쪽 나라의 간호사 역량에 차이가 있다기보단 사회적 인식과 체계가 달라서 오는 간극 같아. 중요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가치가 서로 다르니 같은 직업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거지. 한쪽만 경험하고 다른 쪽을 직접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슨 소리인가 싶을 거야. 새로운 곳에서 느끼고 깨달은 부분을 천천히 들려줄 테니 따라와 줘.
여기서 살다 보면 어디서든 쉽게 형광 작업복을 입은 사람을 볼 수 있어. 마트, 식당, 카페와 같은 일상생활 공간에서 먼지와 땀이 가득한 이를 자주 접해. 아이의 등하교 시간에 학부모로서 서로 만나기도 하고. 우리나라로 치면 막노동이나 노가다라는 저속한 용어로 밑바닥 취급을 했을 이들이지. 저들의 흔한 등장보다 더 놀라운 점은 나 말고는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는 분위기야. 몸을 써서 일하면 못난 직업이라는 고정관념이 들어찬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어. 이곳에선 그저 수많은 직업 중 하나일 뿐이야. 위아래 같은 것 없이. 어쩜 이리도 우리와 다를 수 있는지 알아봤어.
노동력을 인정하는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야. 일을 해서 받을 수 있는 대가를 향한 눈높이 격차가 커. 올해 23년 한국의 최저시급은 9,620원이고, 해마다 너무 오르는 거 아니냐는 불만은 계속되지. 반면 지금 호주의 최저시급은 22.61불(19,219원 - 환율 850원)로 2배야. 인간의 수고를 여기는 시작점이 다른 거지.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와서 큰돈 벌어간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봤을 거야. 같은 시간 땀 흘리고 배로 받아 가니 가능한 거지.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교과서 속에서나 떠돌던 허황된 문구를 현실 세계에서 만난 기분이랄까. 경제 상황이나 물가 등 따지고 들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인건비를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어. 여긴 다른 이의 근로를 소중하게 생각해. 몸 쓴다고 무시하거나, 열정 페이를 요구하는 건 상상도 못 하지. 두 세계의 차이를 감 잡았다면 내가 하려는 간호라는 일에도 적용할 수 있겠지?
대학 진학률이 현저히 낮은 호주에서 학사 학위를 받으면서 기술과 지식을 습득한 채로 일을 하면 어떻게 될까. 직접 움직이며 치료와 안정이 필요한 환자를 돌보는 신분이라면 상당히 만족스럽게 일할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어쩌다 보니 두 사회의 다른 점이 피부를 찌르는 바람에 구구절절 풀어놓게 되었지만, 내가 이 새로운 공부와 일을 선택한 기준이 그게 전부는 아니야. 떠나오면서 결정하고 다짐한 이유와 같아. 아픈 사람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싶어. 가족이든 지인이든 고객이든. 힘들어하는 주변을 돕고 싶어. 남을 돕는 여러 다른 방식이 있겠지만, 눈을 바라보고 손을 잡으며 힘이 돼주고 싶어. 순수한 내 진심은 종종 생각이 다른 타인을 설득하지 못하기도 했어.
첫 학기 실습 중에 부모님이 비행기를 타고 멀리서 날 만나러 오셨어. 한국의 요양병원과 비슷한 에이지드 케어 홈(Aged Care Home)에서 환자를 보살피며 간호사를 돕는 AIN(Assist In Nursing) 역할을 하고 있었지. 실습이 끝난 오후에 유니폼을 입을 채로 반갑게 아빠 엄마에게 달려가서 지내는 이야기를 마구 풀어놓았어. 우리 집은 어려서부터 미주알고주알 나누는 전통이 있거든. 원래 하듯이 그날 있었던 일을 여과 없이 전했는데 두 분 표정이 안 좋아지는 거야. 그 당시에는 원인을 몰랐는데 지켜보던 남편 초록이 나중에 설명해 줬어. 실습 에피소드를 너무 솔직하게 다 털어놓는 바람에 걱정을 안겨드린 것 같다고.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을 했길래 그러냐고?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 할아버지 기저귀 갈아 드렸지. 밑도 깨끗하게 닦고, 말려 드리고.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생각해 봐. 대소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으면 얼마나 찝찝하겠어.
아찔한 첫인상은 두 분에게 오래도록 남았어. 귀한 딸 뒷바라지해서 그럴듯하게 키워놓았더니, 갑자기 딴 나라로 떠나가서는 똥 기저귀나 치우는 고통스러운 삶을 겪어서 가슴이 아팠데. 배우는 과정일 뿐이고, 여러 일 중 하나이며, 필요하면 해야만 하는 거라고 설명해도 처음의 충격이 가시질 않나 봐. 간호 분야에서 벌어지는 예상과 다른 상황에 놀라는 건 가족만이 아니야. 함께 공부하는 동기나 선후배 중에서도 환자를 위한 조치를 허드렛일로 치부하며 꼴도 보기 싫어하는 이도 있어. 대부분 간호를 원해서 배우지 않고 오직 안정적인 비자를 위해서 붙어있는 경우야.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다면 외국인에 대한 입국허가증인 비자가 필요한데, 자격을 얻기 어려운 간호사가 되면 손쉽게 받을 수 있거든. 이렇다 보니 그들이 입에 달고 사는 주문 같은 희망은 '비자만 나오면 그만둘 거야'로 모이지. 나는 정말로 간호 일에 만족하고 보람을 느낀다고 솔직하게 전하면 반대편에선 당황과 불공감에 휩싸이는 게 뻔히 보여.
원해서 하는 공부, 되고 싶어서 걸어가는 발걸음은 즐겁지만 의욕만큼 되지 않아 좌절도 겪어. 전 세계를 휘청이게 만든 코로나 팬데믹도 한몫을 크게 했어. 한 학기를 겨우 마치고 적응을 해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인간끼리 접촉이 금지된 거야. 교수님을 직접 만나서 묻고 배우고,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어 하나씩 풀어나가는 시간이 순식간에 증발했지. 나 같이 혼자선 한없이 늘어지는 의지박약자에겐 최악의 학습 조건이 갖춰진 셈이었어. 몸으로 직접 해보는 실습수업마저 온라인으로 대체되어 과제를 녹화해서 보내게 되자 이게 뭐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이렇게 배운 걸 현장에서 써먹을 수 있을까 두렵기도 했어. 안 그래도 망망대해에 작은 널빤지에 기대어 둥둥 뜬 느낌이었는데 그마저도 빼앗긴 심정이 돼버린 거지.
더 나아가서 몹쓸 전염병은 외국 도착부터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영어와 한패가 되어 날 괴롭혔어. 병원에 처음 나갔던 두 번째 실습은 의료시설이기에 마스크를 항시 필수 착용해야 했어. 대화할 때 우리가 표정으로 대단히 많은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거 알지? 특히 모국어가 아닌 낯선 외국어를 사용할 땐 더욱더 기대게 되거든. 근데 얼굴을 눈만 남기고 가려버리면 어떻게 되겠어. 바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겨. 상대의 언어를 알아듣기가 곱절로 어려워져서 고생을 많이 했어. 또박또박 들려줘도 놓치기 쉬운 의학용어까지 넘쳐났으니, 어휴. 남의 것만이 아니라 내가 쓴 마스크도 악영향을 끼쳤어. 가뜩이나 빈약한 한국인의 발성이 한 장의 가림막 때문에 더욱 약해져 전달이 잘되지 않았고, 애매한 상황을 타파해 주는 필살 무기였던 얼굴 전체가 웃는 환한 미소도 도통 써먹을 수가 없었지. 보이는 눈으로 어떻게든 웃어보려고 애굣살 눈화장을 마스터했다면 처절한 몸부림이 실감이 나려나.
내게 맞는 일을 찾아가는 길은 때론 막막해도 자주 근사했어. 결국에 가서 나와 어울릴지는 여전히 불확실했지만, 나의 의지로 정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기쁨은 두려움을 앞섰지. 만약 좋아했던 그림과 음악을 계속했다면 이런 감정이었을까. 원하는데 불안하고, 즐거운데 확신이 없는. 복잡한 감정에 휘둘리지만,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어. 가끔 후회도 하고, 종종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싶을 정도로. 다만, 모든 몸과 정신이 온 힘을 다해 집중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어. 여태 이런 적이 없었거든. 어쩌면 난 천직을 만나는 중일지도 모른다는 묘한 쾌감에 젖곤 했어. 태어나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