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피부색의 의미

<초록의 사정>

by 초록Joon

"너, 망고 좋아해?"


두 학생을 등교시키고 혼자 장 보러 가던 길에 처음 보는 백인 남자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어. 내 뒤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돌아봤는데 나밖에 없더라고. 살짝 당황했지만 영어 공부하는 셈 치고 대화를 이어 나갔지. 냄새가 싫어서 안 좋아한다고 했더니, 이번엔 잭프룻(Jackfruit)은 좋아하냐고 묻는 거야. 뭔지는 아는데 내 취향이 아니라고 답하니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놀라움을 뱉었어.


"너, 태국에서 온 거 아니야?"


한창 검게 그을렸던 날 보고 오해했나 봐. 아니면 우리가 서양인의 국적을 구분 못 하듯 자신만의 추측을 들이댄 걸 수도 있고. 대충 마무리 짓고 돌아오는데 찝찝하더라. 그러는 넌 어디서 왔냐고 물어볼걸 그랬나 싶었지. 이백 년을 갓 넘긴 이민자 천지인 나라에 너나 나나 어차피 다 밖에서 온 건 마찬가지 아니냐고 쏘아대면서 말이야.


호주에 지내면서 종종 신상을 밝혀야 하는 경우가 있어. 회원 가입을 한다든지, 자기소개를 한다든지 등등. 이럴 때 빠지지 않는 항목이 어디서 왔는지야. 'Where are you from?' 구구절절 한국 떠나온 사연을 꺼낼 필요가 없으니 현재 살고 있는 지역을 대거든. 대부분 넘어가는데 꼭 묘한 표정으로 다시 묻는 사람이 있어. '아니, 주소 말고 고향. 네가 태어난 곳.' 거짓말할 수는 없으니 대한민국이라고 답하지. 그제야 속 막힌 게 뚫린 얼굴로 개운해하는 걸 자주 봤어. 친해지고 나서 궁금할 수는 있어도 만나자마자 물어보는 건 실례일 텐데, 왜 그러는 걸까. 앞의 '망고 사건'도 마찬가지야. 우린 당신들에게 영국인지 미국인지 유럽 어디에서 왔는지 안 묻잖아. 지금 지내는 곳이 중요한 게 아닌가? 어떤 이유든 간에 호주에서 어울려 살고 있으면 다 같이 호주 사람 아니냐고. 괜히 나의 어눌한 영어 때문이려니 자책만 하게 돼. (영무룩...)


그 후론 길을 걷다 마주치는 백인을 보면 엉뚱한 생각을 해. '너희는 좋겠다. 조상들이 먼저 깃발을 꽂은 덕분에 주인으로 살고 있어서.' 주인 없던 호주에 가장 일찍 정착해서 제 집으로 삼은 그들에 대한 부러움이야. 미국을 비롯한 신대륙은 선점한 사람들이 주도권을 가지잖아. 기존에 평화롭게 살고 있던 원주민과의 관계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는 공통점도 있고. 아무튼 호주는 백인이 중심이 되어 굴러가는 나라야. 하얀 피부가 가운데 자리를 잡고 다른 색 피부가 곁에서 살아가지. 원래 살던 어두운 피부도 있고, 멀리서 꿈과 희망을 찾아온 누렇거나 검은 피부도 많아. 비슷한 계열의 밝은 피부도 새로이 들어오는데 원래의 주인과 차이가 없어서 티는 덜 나. 가지각색의 인간이 한곳에 모이면 색깔로 나뉘는 은근한 위아래를 느껴. 물론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어. 미리 안방을 차지한 마님의 눈치를 보느라.


어느 날, 호주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어. 수업 시간에 '아리랑'을 들으면서 '부채춤'을 연습하고 있다네. 학교 전체가 모일 때 한국인 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함께 공연할 예정이라고 했지. 자기 학년 중 유일한 코리언, 아들에게 한국에 대한 소개도 부탁했대. 여기 오기 직전까지 전통문화와 전래놀이를 즐기는 어린이집을 다녔던 아들은 기뻐했어. 주목받게 된 것을 쑥스러워하긴 했지만 싫지 않은 눈치였지. 하얗지 않은 피부색을 물려받은 아이가 혹시나 주눅 들거나 위축될까 봐 걱정이었는데, 본인의 색깔을 드러낼 긍정적인 기회를 가진 것 같아 덩달아 기분이 좋더라고. 그런데 나중에 소식을 전해 들은 아내 파랑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어.


다양한 문화를 나누는 활동은 환영하나, 굳이 한국인 학생만 따로 모아서 무대를 만든 방식을 향한 불쾌함을 강하게 표했어. 난 한국 문화니까 한국 아이들이 하는 게 자연스럽다고만 생각했거든. 근데 파랑의 입에서 이어지는 아찔한 비유와 예시를 듣고 나니 마냥 그렇지 못했지. 만약 외모만 한국인이고 호주에서 태어난 친구라면? 또는 혼혈이나 입양된 아이라서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른다면?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로만 구분 지어 나누는 무분별함에 대한 격한 반감이었어. 결정적으로 따로 모아서 세우는 모습이 '동물원 원숭이' 같을 수 있다고까지 했지. 상상해 보라고. 힘없는 소수민족 아이들에게 전통 의상을 입혀서 춤을 추게 하는 모습을. 좀 많이 간 거 아니냐고 대답하려다 스치는 기억이 떠올라 멈칫했어.


아들이 한국을 소개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어. 학교에 간 첫 해, 당시 담임 선생님의 배려가 있었지. 학년 초의 자기소개 순서에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나 과자를 곁들이면 수줍은 아들이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말씀을 해줬어. 그건 제안이었어. 받아들이고 말고는 우리의 결정에 달린. 이 부분이 이번과 그때의 차이야. 사전에 해당 가정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았어. 어떤 취지로 이벤트가 기획되었으며, 아이를 참여시켜도 괜찮은지 동의를 받는 절차가 쏙 빠졌지. 최소한 미리 안내라도 해주었더라면 나았을 텐데. 밝은 아이의 반응만 보고 별생각 없이 넘어가려다 날카로운 파랑의 한 수에 머릿속이 복잡해졌지. 결국 선생님과의 면담에서 우리의 불편함을 말씀드렸어. 이해와 공감을 받고 마무리되었지.


한국을 떠나 살면서 가족과 지인에게 빼놓지 않고 듣는 질문, '인종차별 심해?'. 존재의 유무를 묻는 게 아니라 정도를 궁금해하지. 없을 리 없다는 전제를 깔고서. 직접 두들겨 맞거나 심각한 불이익을 당한 적이 없으니, 요즘이 어느 시대냐고 되물으며 걱정 말라고 대답은 하는데 마음 한편은 찜찜해. 하얀 앞사람에겐 환하게 웃던 직원이 내게 퉁명스러워진다거나, 아이의 하얀 친구 부모에게 보낸 연락의 답을 못 받거나, 하얀 환자가 간호사 파랑의 영어를 지적하며 무시했다는 이야길 들을 때면 표정 관리가 어렵거든. 우연이라고 넘기기엔 빈도가 좀 아슬아슬하게 찰랑거리니까. 아무래도 우린 주류 인종이 아니잖아. 지나가면 사람들이 한 번 더 돌아보는 상황이 지금도 벌어진다고. 익숙해져서 훑어보는 시선조차 느끼지 못할 때도 있지만.


이곳은 다양한 인종, 민족, 문화가 섞여서 살아가. 수많은 다양함을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한 움직임은 분명히 존재해. 교육부터 법까지 상당히 치밀하고 철저하게 준비하고 대비하고 지켜나가. 그럼에도 아직 정말 모두가 동일한 위치에 서 있는지 의문이 들어. 하루가 멀다고 나오는 차별과 혐오 사건은 같은 시대에도 진행 중이니까. 강 건너 불구경이라고 하기엔 충분히 뜨겁고 생생하지. 개인의 상식이라고 믿는 평등 의식과는 별도로 사회의 인식과 분위기가 계층을 만든다고 봐. 이 땅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 하얀 사람의 깃발 꽂기는 여전히 유효한 의미로 남아있어. 누가 더 위에서 군림하는 게 옳은지.


앞으로 여러 세대가 지나면 호주를 포함한 온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지금처럼 백인, 흑인, 황인의 순서 정하기는 여전할까. 이제 블랙 캡틴 아메리카도 등장했으니 다음은 옐로 차례이려나. 한국에서 한국인으로만 지낼 때는 마주하지 않았던 의문이야. 못 보던 것을 보고 느끼면서 고민이 늘었어. 왜 애초에 다 똑같지 않고 서로 다르게 생긴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걸까? 진정한 평등에 보이는 외모가 방해된다면 눈을 감으면 해결이 될까? 변하지 않을 피부색을 감추고 싶은 날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꾸준히 고개를 들 풀리지 않을 궁금증이 생겼어.




<초록의 사정>은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