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전에 얻은 고민, 불안, 걱정

<노랑의 사정>

by 초록Joon

친구 : "익스큐즈미(Excuse me)."

나 : "유아웰컴(You're welcome)."


어때, 자연스러워 보여? 친구가 내 앞을 지나가면서 실례한다고 말하는 상황이야. 지금은 아니고 호주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유치원에 다닐 때 이야기지. 시간이 꽤 흘러 영어가 편안해진 요즘, 갑자기 이 장면이 떠올랐어. 얼굴이 뜨겁게 화끈거리면서 말이야. 흔한 인사말, 땡큐(Thank you)를 들으면 뭐라고 말하지? '천만에'라는 의미로 유아웰컴(You're welcome)으로 화답하지. 그러니 난 저 상황에서 생뚱맞은 말을 하고 만 거야. 지나가던 친구가 짓던 오묘한 표정이 선명해. 그땐 뭐가 이상한지도 몰랐지만. 얼핏 대충 넘어가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근데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사람한테 환영한다는 건 좀 안 맞지 않아? 적절하게 어울리는 대화는 아닌 거지. 미묘한 차이를 다 떠나서 영어 쓰는 사람들이 그렇게 쓰지 않아. 말이라는 건 쓰는 방식에 맞춰 사용해야 서로 이해할 수 있잖아. 우리 한국말 중에도 왜 그런지 물어보면 설명하긴 어려워도 그냥 이렇게 쓰는 게 맞는다고 답하는 게 많듯이. 영어의 적당한 감이 잡히고 나자, 옛날에 실수했던 게 막 생각이 나면서 부끄럽더라고. 그러고 보니 아직도 민망할 때가 있네. 이제 어지간히 알아듣고 표현 좀 하겠다 싶은데도 서글픈 순간이 종종 찾아오거든.


여기서 잠깐. ABC도 몰랐던 내가 영어를 배운 과정이 궁금하지 않아? 우리 집은 한국에서 티브이를 안 봤어. 벽에 붙어 있긴 했는데 엄마랑 아빠가 켜는 일은 없었지. 여기로 이사 와서는 아예 마련도 하지 않았어. 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어느 날 아빠가 다른 사람이 쓰던 걸 구해왔어. 그때부터 호주 어린이 채널을 자꾸 틀어주는 거야. 인형이랑 만화랑 사람이랑 나와서 알록달록 재밌게 노는데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있어야지. 알아듣지 못해도 화려한 영상은 시선 잡아두기 선수였어. 아침저녁으로 한참을 보다가 유치원에 가니 친구들이 티브이에서 나오던 캐릭터 이름을 꺼내며 노는 거야. 그전까진 모르다가 갑작스레 귀에 들어왔지. 아는 게 나오니 나도 한 마디씩 하면서 같이 놀고, 또 집에 와서 보면서 배우고. 그렇게 티브이가 영어를 가르쳐줬어. 학교에 가서는 특별 대우를 받았어. 아무래도 여기서 태어난 친구들보단 서툴렀기에 나 같은 친구들을 따로 모아서 천천히 알려줬어. 내 속도에 맞춰 줘서 편안하게 배웠어. 몇 달을 다녔을까. 하루는 친절한 영어 선생님이 더 이상 오지 말고, 반 친구들과 같이 공부해도 된다고 했어. 큰 도움을 받은 수업이 EAL(English as an Additional Language) Class였다고 아빠가 알려줬어. 그 이후로는 별문제 없이 하고 싶은 말 하고, 주변에서 뭐라고 하는지 알겠더라고. 다만, 무리 없던 내 영어 생활에 찬물을 끼얹은 건 다름 아닌 내 사랑 농담, 조크(Joke)였지.


여기 친구들도 나처럼 말로 장난치고 우스갯소리 하는 걸 즐겨. 지난번에 내가 만든 영어 조크 기억하지? 다들 뒤집혔었잖아. 처음 읽는 사람도 있을 테니 하나만 보여줄게. 네 이름이 뭐야? 준(Joon). 그럼 코가 영어로 뭐지? 노즈(Nose). 내 두 손에 뭐가 있지? 나씽(Nothing). 'Joon knows(노즈) nothing.' 넌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히히. 당했지? 이렇게 내가 만든 건 곧잘 써먹는데, 반대로 들을 땐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어. 그래서 나 빼고 다 웃으면 기분이 속상해. 무슨 말 한 지 분명히 들었는데, 이해를 못 하겠어. 왜 웃는지 물어볼 용기도 없고. 이미 다 낄낄대고 넘어갔는데 누굴 붙잡고 설명해 달라고 하겠어. 부모님께 털어놓으니 사는 곳마다 문화와 정서가 달라서 그렇다 하더라고. 누구에겐 우스운 말이 다른 이에겐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며. 그럴 수 있다는 위로를 받았지만, 여전히 시원하지 않아. 뭔 말인지 아는데 함께 즐기지 못하는 상황이 당황스러워. 영어 쓰는 친구들과 자라나는 한국인 농담 마니아의 고민거리야.


또 다른 불안거리도 있어. 내가 여기에 지내려 온 목적이 뭐였지? 가족과 더 많이 오래 붙어있고 싶어서라고 했잖아. 한국에선 엄마 아빠가 내가 눈 뜨기 전에 나갔다가 눈 감고 나서 들어왔거든. 늘 함께인 지금은 상상조차 안 되지만. 제일 중요한 나의 사랑하는 가족, 부모님이랑 떨어질까 봐 걱정이 많아.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할 거야. 흥분하지 말고 들어봐. 벌써 우린 3번이나 못 만날 뻔했다고. 처음은 학교 첫해에 수업 마치고 기다리던 순간이었어.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날 찾으러 오지 않는 거야. 항상 앞에서 세 번째 안으로 날 데리러 왔었는데. 하나둘 친구들이 모두 떠나고 선생님과 나만 남았어.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엄마랑 아빠가 뛰어왔어. 눈물범벅이던 난 다시 엉엉 울면서 안기며 이유를 물었지. 어딜 멀리 다녀왔는데 도로가 교통사고로 차가 밀려서 그랬대.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여유롭게 일찍 다니겠다고 했어. 덕분에 아직 그때처럼 혼자 오래 남겨진 적은 없어. 하지만 요즘도 교실 밖에 나와서 엄마나 아빠가 눈에 바로 안 보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 혹시 두 분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겁나고, 나 혼자 남겨지면 어떻게 되는 건가 싶어서. 여긴 날 돌볼 할머니, 할아버지도 없잖아.


믿을 수 없겠지만 이게 끝이 아니야. 학교 밖에서도 엄마랑 아빠가 사라졌어.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오랫동안 미술 학원에 다니고 있어. 차로 데려다주고, 한 시간 반 수업하는 동안 밖에서 기다렸다가 같이 돌아와. 학교 다니는 형님이 되었는데 늦지만 않게 돌아오면 어딜 잠시 다녀와도 되지 않겠냐고 할 테지. 지금부터 소개할 사건이 없었다면 그랬을지도 몰라. 한 번은 레슨을 마치고 차로 돌아왔는데 못 보던 내 신발이 있는 거야. 어디서 난 거냐고 물어보니 기다리는 동안 중고 가게에 다녀왔다고 했어. 그 이야기를 듣는데 온몸이 아찔해지는 거야. 나한테 미리 말도 안 해주고, 멀리 나갔다가 또 제시간에 못 오면 얼마나 무서웠을까. 곧장 울음이 터져서 앞으로 절대 그러지 말라고 했어. 깜짝 놀란 두 분은 미안하다고 사과했지. 저번의 학교에 홀로 남았던 아픈 기억이 이토록 깊이 새겨진 걸 몰랐었나 봐. 가까운 근처라서 금방 다녀오면 괜찮을 거로 생각했대. 그게 마지막 공포였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날도 미술을 배우러 간 날이었어. 엄마랑 둘이 왔는데, 학원으로 들어가면서 어디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엄마를 믿었어. 한 30분쯤 지났나. 어떤지 기분이 싸해지면서 불안해지는 거야. 다급히 선생님께 손들고 밖에 엄마가 있는지 보고 오겠다고 했어. 손에 붓을 들고 가운을 입은 채로 헐레벌떡 달려 나왔는데, 이게 웬걸. 우리 빨간 차가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는 거야. 하늘이 무너진 기분이었지.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선생님께 엄마에게 전화해 달라고 했어. 통화 연결이 되자마자 막 울면서 어디 갔냐고 외쳤지. 아빠가 머리 자르고 난 뒤에 미용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데리러 왔다며, 이미 미술학원에 거의 돌아왔다고 했어. 정말로 두 분은 내 눈앞에 곧 도착했고, 나를 안고 달랬어. 아니, 나와 방금 한 약속을 어기고 없어질 수가. 그 후론 엄마든 아빠든 어디에도 못 가. 다시는 어떤 이유로든 아무 데도 가지 않기로 했거든. 항상 밖에서 조용히 날 기다리는 이유야.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가족과 헤어질 뻔한 위기는 상처로 남아있어. 내 전부인 그들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도 하기 싫어.


앞선 2가지 고민과 불안은 점점 나아지고 있어. 영어의 숨겨진 맥락을 눈치채가고 있고, 부모님도 말없이 사라지지 않겠다는 맹세를 지키고 있거든. 모든 게 안정이 되나 싶었는데 최근엔 또 다른 근심이 생겼어. 스스로 따져봐도 도움받을 곳이 딱히 없어서 답답하네. 음, 뭐냐 하면... 친구 문제야. 아, 왕따나 괴롭힘 같은 건 아니니 안심해. 학교에서 잘 맞는 친구들이랑 어울려 지내. 밥도 같이 먹고 쉬는 시간에도 정신없이 놀면서. 근데 이상하게 학교가 끝나고 난 후에는 같이 놀기가 어려워. 다른 친구들끼리 전날 어느 공원에서 놀았다거나, 누구 집에 가서 자고 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괜히 부럽거든. 나도 함께 잘 놀 수 있는데 말이야. 가장 큰 충격은 초대받지 못한 생일 파티를 알게 되었을 때 찾아왔어. 같이 노는 무리인데 왜 날 부르지 않았을까. 어릴 적엔 이러지 않았었는데.


학교 끝나고 친구들과 노는 종류가 몇 가지 있어. 미리 약속을 정해서 놀이터 같은 곳에서 만나 노는 플레이 데이트(Play Date), 친구나 우리 집에서 하룻밤 자면서 노는 슬립오버(Sleepover).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이벤트는 생일 파티(B-day Party)야. 주인공이 되어 친구들에게 축하와 선물을 듬뿍 받고, 마음대로 신나게 원 없이 노는 날은 일 년 내내 기다리게 만들지. 생일 초대받아 여러 번 가봤고, 내 생일마다 초대해서 잊을 수 없는 날을 보냈어. 여러 노는 방식으로 막 학교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몸이 모자랄 정도로 학교 밖에서도 함께 놀러 다녔는데, 요즘은 뜸해졌어. 친구랑 약속을 잡아도 친구 집에 다른 일정이 생겨서 번번이 어긋나느라 못 만날 때가 많아.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기다리다 돌아온 적도 꽤 있거든. 우리 엄마 아빠도 나서서 친구 엄마 아빠와 이야기도 나누고 따로 연락도 해보고 하는데도 잘 연결이 안 되나 봐. 아쉽지만 학교에서는 충분히 놀고 있으니 참을 만해. 그런데 생일 초대장을 못 받은 건 여전히 이해되질 않아. 한 번은 너무 답답해서 직접 물어봤어. 왜 나를 초대하지 않았느냐고.


난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꺼내지 못하는 수줍은 아이야. 내가 초대받지 못한 이유를 물었다는 건 정말 큰 용기를 낸 거야. 항상 붙어서 노는 나를 뺀 사정이 무엇일지 궁금했어. 친구의 답변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했어. 깜빡했대. 뭐라고 하겠어. 더 웃긴 건 그 이후로도 그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 같이 오락하는 게이밍 나이트(Gaming Night)를 하자고 하는 거야. 어쩌자는 걸까. 친구란 무엇인지 헷갈려. 부모님이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인 것 같아. 내가 다뤄야 하는 나만의 숙제지. 어른이 될수록 누구와 어떻게 어울리는지는 혼자서 정하고 부딪혀야 하니까. 머리가 작던 아기에서 머리가 커진 소년이 되었으니 머리를 굴려 봐야겠어.


여기까지가 10살이 되기 전에 갖게 된 고민, 불안, 걱정이야. 생각거리가 생기면 엄마 아빠와 자주 나누곤 해. 정성껏 들어주고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넘치도록 전해주지. 그것만이 그들의 몫이란 걸 알아. 누구도 나 대신 나서서 풀어줄 수 없다는 것도. 다행인 건 내 장점을 골칫거리만큼이나 제대로 알고 있다는 거야. 난 회복력이 강한 사람이야. 살며 겪는 여러 일에 양옆과 위아래로 흔들려도 쉽게 나의 중심을 찾는 힘을 가졌어. 사실 이건 두 분한테 들었다는 걸 밝힐게. 물론 나도 똑같이 생각해. 어때, 내가 가진 능력이 멋지지 않니? 어떤 위기에 처해도 나를 지키며 풀어나가 보려고 해. 휘어지지도 부러지지도 않고 되돌아오는 고무줄처럼 탱탱하게.




<노랑의 사정>은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