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에서 만난 낯선 우울

<초록의 사정>

by 초록Joon

처음 겪는 우울은 어색했어. 살면서 이런 적이 있었는지 떠올려 봤지. 부모님의 죽음을 떠올렸던 십 대? 그건 우울이라기보단 공포에 가까웠어. 그럼, 이별을 겪은 이십 대였나? 가라앉긴 마찬가지였지만 잠시 희망을 놓친 순간적 절망이었지. 다른 대상이 생기면 씻은 듯 나아 버리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어. 뒤질수록 나로만 가득 찼던 지난 세월만 모습을 드러냈지. 오로지 나 자신으로 꽉 채워진 과거엔 우울이 낄 틈이 없었어. 내가 전부인 것 마냥 나 잘난 맛에 살던 그때엔 축 처질 시간도 부족했었나 봐. 그런데 나를 잃어버린 타지에선 너무도 쉽게 노출된 거야. 적절한 방어 도구는커녕 변변한 옷도 걸치지 못했으니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지.


내가 빠져버린 하루를 그려볼게. 아침엔 아이의 등교를 준비해서 보내고 돌아와. 텅 빈 집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끝나지 않는 집안일을 하다 혼자 점심을 먹고 치워. 하교 시간에 맞춰 아이를 데리러 가. 만나서 함께 쉬고 먹고 놀다 잠들지. 어렵고 힘든 건 없었어. 전엔 가져보지 못한 휴식이 달콤했고, 가정을 꾸리는 충실한 생활이 흡족했지. 한동안 아무렇지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조급해졌어. 내 이름이 아닌 아들 노랑의 아빠와, 아내 파랑의 남편으로만 불리게 되면서. 집을 지키는 여성 가정주부가 누구 엄마, 누구 집사람으로 평생 살아가듯이 말이야. '뭐 하는 초록'이라고 들어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해질 무렵, 그토록 바랐던 삶의 공백이 갑자기 허옇게 빈 답안지로 변해 나를 덮쳤지. 가득한 빈칸을 이대로 두면 빵점이 뻔한데 계속 멍하게 살 거냐고 쿡쿡 찔러대면서.


인생은 고민거리를 던지지만, 고민할 시간까진 주지 않더라고. 그즈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가 터졌거든. 잠시 집을 나가던 아이는 학교에 가지 못해 하릴없이 집에 머물게 되었지. 덕분에 난 선생님 역할까지 맡느라 잠깐의 숨 돌릴 시간조차 사라졌고. 그럴싸한 명칭의 홈스쿨링은 양육자의 인내를 갈아 넣어 세운 고통의 결과물임을 깨달았지. 나중에 다시 학교는 열렸지만 보이지 않는 불안감에 방학은 일찍 시작하고 개학은 늦게 이루어졌어. 스쿨 홀리데이의 연장은 단순한 일정 조정이 아닌 삶의 균형이 흔들리는 지각 변동이었지. 여기까진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모두의 상황이라 어찌어찌 견딜 만했어. 문제는 바다 건너 들려온 내게만 해당하는 무거운 소식이었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


여기선 말할 기회가 없었는데, 내가 제대로 아빠 역할을 하고 싶어진 계기는 아버지의 영향이었어. 전형적 가부장이었던 아버지와 난 대화가 부족했어. 어머니의 손에서 자란 나는 아버지를 잘 몰랐어. 서먹하고 말 없는 관계로 남은 우리가 싫었지. 손주가 태어나면 달라지려나 싶었는데 그는 변함없이 관심과 표현이 적었어. 그에게 느끼는 아쉬움을 간직하면서, 나는 내 아이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결심을 했지. 당신과 달리 나는 진정한 아빠가 되겠다며 인사를 남기고 떠나왔는데 이토록 허무하게 작별했어. 하필 때맞춰 극심해진 코로나의 영향으로 장례식조차 갈 수 없었지. 서로 표현하지 않은 탓에 결국 속마음을 알지 못한 채로 우린 헤어졌어. 꼭 아빠가 되어 아버지를 다시 만나면 내 마음을 직접 전해보려고 했었는데.


육아에 전념하다 내가 사라진 듯한 기분에 겪던 공허. 전부를 쏟아부어 갖고자 했던 아빠라는 정체성을 증명할 대상의 부재. 이미 비워질 대로 비워져서 허울만 남은 상태였는데, 그마저도 무너져 날 유지하던 모든 게 부서진 느낌이었어. 가뜩이나 새로운 경험에 취약한 나에겐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생소한 심정이었지. 쪼그라든 자존감 때문에 바닥까지 내려와 겨우 기어가다가, 버티던 바닥마저 꺼져버려 한없이 밑으로 떨어지기 충분한. 그땐 뭐가 이리도 축 처지고 힘이 나질 않는지 알 수 없었어. 스스로 자신을 살피고 점검해 볼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거든. 본인도 설명할 수 없는 가라앉음을 남에게 알리며 도움을 청하긴 어려웠어. 가까운 가족에게도 티를 내지 않았던 이유야. 뭔지 모르지만 내가 우울하니 어떻게 좀 해달라는 건 내가 사는 방식이 아니거든. 나도 감당 못 할 부담을 손쉽게 옆에 던지는 건 옳지 않잖아. 그럴 수만 있다면 죽을 때까지 지키고 싶은 억센 신념이랄까.


완전히 넘어져 쓰러지기 전에 만병통치약이 해결해 줬어. 뭐긴 뭐겠어, 시간이지. 삶은 돌아가고 역할은 변치 않으니 터벅터벅 걷다 우연히 실마리를 잡았어. 여기서 나는, 날 나타내지 못한 채 꽉 막혀있었어. 부끄럽지만 한국에선 말이 참 많았거든. 넘치면 넘쳤지 절대 모자라지 않았지. 실수와 오해를 양산하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으니 나쁜 버릇에 가까웠달까. 타지에서 언어와 관계의 단절로 표출의 통로가 사라지자, 병이 났던 모양이야. 나를 위한 나만의 시간이 없다는 답답함은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살고 있다고 외치지 못하는 소통의 중단이 원인이었어. 진단을 마치자 방법을 찾아 나섰지. 갑작스레 아이와 아내를 붙들고 쉴 새 없이 떠드는 건 아닌 것 같았고, 빈곤한 영어 실력을 들고 나가 다른 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과 수다 떨 자신도 없었어. 그렇다고 대세인 유튜버가 되어 영상으로 찍어 남길 재주도 흥미도 부족했고. 마뜩잖은 걸 치우고 나자 하나가 남았지. 바로 지금 쓰고 있는 '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퍼부었어. 형식과 맞춤법도 무시하고 쌓여있던 욕구를 해소하듯 마구마구. 아무리 글자에 퍼다 날라도 할 말은 줄지 않았어. 수다쟁이를 입 막아 두면 글에 화풀이하는 걸 알게 됐지. 한을 내뱉듯 적는 글이 쌓일수록 발밑의 부서진 바닥이 모여들어 단단해졌어. 믿을 수 없는 거짓말처럼 말이야. 인간은 살아가면서 풀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지. 생리, 안전, 애정, 존중 같은. 억눌린 적 없이 살아와서 몰랐는데 나는 생각과 감정을 발산해야 풀리는 사람이었어. 짐작하건대 아버지와 나 사이의 부족했던 표현이 지금의 넘치는 표현 욕구에 한몫을 했을 거야. 아무튼 글은 나와 딱 맞았어. 학창 시절 한 글자도 직접 쓰기 싫어 도망 다녔고, 회사에선 보고서를 어떻게든 적게 쓰려고 피해 다녔는데 아이러니하지. 물론 이 글과 그 글은 다르지만.


내게 활력을 불어넣는 단짝을 만나자, 생활은 분명하게 달라졌어. 알고 보니 글은 매력이 넘치는 친구였어.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는데 이만한 수단이 없더라고. 한동안 미쳐 살았던 '말'보다도 훨씬 좋더군. 생각해 보자고. 말을 하려면 대화 상대가 있어야 하잖아. 그게 전화든 만남이든 간에. 듣는 사람을 실시간으로 즉각 즉각 신경 쓰느라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 한 경우가 얼마나 많아. 눈치 보다 말을 바꾸거나 접기도 하고, 해야 할 말을 제 때 못 하고 돌아와서 이불킥 날린 게 한두 번이냐고. 근데 글은 그런 게 전혀 없어. 중간에 끼어들어 시비 걸거나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어. 최소한 쓰는 동안은 아무도 날 방해하지 못해. 나를 온전히 담아서 내보이는 데 최적이야. 우울에 빠진 게 언제였냐는 듯이 사랑에 빠졌어. 미친 사람 같이.


쓰다 보니 쓰는 사람을 만났어. 신기하게도 나처럼 우울의 처방으로 글 쓰는 사람이 많더라. 특히 육아로 자연스럽게 사회와 멀어진 주부가 갑갑함을 해소하고자 쓰게 된 사연이 와닿았어. 그때 알았지. 내가 겪은 증상이 육아 우울이었구나. 아이라는 세계에만 갇혀 존재하며 다른 곳에선 자아를 잃어가는 괴로움. 나랑 꼭 맞아떨어지는 고백에 놀라다가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 다행히 여기까지 잘 찾아왔구나. 더 깊어져서 큰일 날 수도 있었는데. 잊고 살던 감사가 그제야 툭 하고 튀어나왔어.


여전히 평일 오전 9시와 오후 2시 30분 사이를 빼고 나면 아들과 합체하는 일상은 똑같아. 다만 타고난 성급함에게 구석으로 몰리며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은 사라졌어. 내겐 나를 담아 밖으로 전할 수 있는 펜이 생겼거든. 정확히는 키보드지만, 어쨌든. 글을 쓰게 되면서 몰랐던 나를 알아가고 있어. 선명하게 드러나는 글자의 생생함에 놀라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해. 말로 쏟아내며 느끼던 쾌감과는 또 달라. 즉석에서 튀어나와 혀에 감기는 목소리엔 진득함이 없었어. 아차 싶을 때도 많았고, 설익은 채로 뱉어서 입을 연 나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를 때가 많았거든. 급급한 배설의 희열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문자로 정제된 나는 보다 명쾌해. 가진 취향과 가치를 투명하게 보여줘. 막혔던 자아의 노출이 허용되자, 찾아왔던 우울과는 급히 결별했어. 하루가 의미 없고, 반복될 내일이 지겨웠던 시간은 끝났지. 단지 기대만 벅차올랐어. 오늘은 어떤 글로 내가 가득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