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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Sep 25. 2024

선생이 되려던 자의 결심

예전부터 석사는 도망자라 여겼다. 바로 사회에 나서지 못하고 현실과 부딪히는 시기를 억지로 늦추는 자연스럽지 않은 존재. 요리조리 공부를 피하던 내겐 더 학습하고 싶다는 말이 공허하게 다가왔다.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없었기에 학문을 갈구하는 모습이 와닿지 않았다. 마스터(Master)라는 거대한 학위명도 마뜩잖아 보였다. 완벽히 갈고닦아 익히는 수준은 요다(Yoda)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거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최고이자 최선의 길이라 믿고 사회로 바로 나와 일을 시작했다. 지루한 상아탑을 떠난 지 십 년도 훨씬 넘은 지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대학원 개강을 앞두고 있다.


선생이 되어 가르치는 꿈이 있었다. 점수에 맞춰 대학을 가는 국룰에 굴복하고 꿈을 접었다. 짜인 길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살아오다 지쳐서 멈췄다. 돌아보니 내 발로 스스로 걸어온 길이 없었다. 다들 그렇게 산다는 말만 믿고 이미 파여있는 발자국에 빗나가지 않도록 발을 포개며 지내왔더라. 멈춘 김에 다음 발걸음은 어느 쪽으로 뗄 것인지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혼자만의 생각이 부족했기에 나는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며 어디로 가고 싶은지 물었다. 쉼 없이 굴러가는 쳇바퀴 같던 현실과 멀어진 덕에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일을 많이 벌이고 경험했다. 나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접어둔 꿈이 꿈틀댔다. 배워서 그 배움을 나누고 싶다는 소망이 다시 부풀어 올랐다. 진작에 사라진 줄만 알았는데.


쉬는 동안 글을 쓰고 책을 엮었다. 나를 표현할 기회는 처음이라 글에 가진 마음과 느낌을 자유롭게 담기 시작했다. 좋은 인연이 닿아 해마다 책을 내고 있다. 내가 적은 글로 책을 만들어 낸 경험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한글의 매력을 깨우치게 했다. 그저 쓰여진 언어로만 당연히 치부하다가 쓰면 쓸수록 빠져드는 재미와 알면 알수록 어려운 고통에 헤어나기 어려웠다. 또한 타지에서 아이의 육아를 전담하면서 한국어 교육을 맡았다. 영어 환경에서 자라는 아들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알려줬다. 백지를 채우는 시간이 매번 즐겁긴 어려웠지만, 하나둘 알아가는 절경을 바라보는 건 더 없을 감동이었다. 한고비를 넘고 나자 같은 가르침이 필요한 다른 아이들이 보였다. 제한된 외국에서 어쩔 수 없이 모국어를 잃어가는 친구들. 측은지심과는 거리가 먼 내가 짠한 심정을 품은 건 의외였다.


속내를 알아채고 힘껏 부추긴 건 다름 아닌 아내 파랑이었다. 글을 좋아하고 잘 쓰길 원하는 나를, 그리고 어려서부터 선생님이 되고 싶어 했던 나를 알고 있던 그녀는 피할 수 없는 조언을 했다. 당신의 글이 더 깊어지면서 쌓인 지식을 나눌 좋은 기회가 어쩌면 한국어를 가르치는 길이 아니겠냐고. 이유도 모르고 소비되어 왔던 지난날과는 다르게 앞으로는 원하는 걸 배우고 전하며 살고 싶었다. 남이 정해주고 시킨 일이 아닌 스스로 판단한 결정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할 수 있을까 보단 하고 싶다는 의지로 결심했다. 생애 처음으로 공부를 선택한 순간을 맞이했다. 조금 늦었지만 적성에 맞는 천직을 혹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쉽게 생각했다. 수능을 보고 들어가는 대학이 아닌 대학원은 원하면 언제든 누구라도 갈 수 있다고. 가벼운 마음은 먼저 지원서를 앞에 두고 철렁했다. 대학 마지막 학년에 취업을 위해 수없이 썼던 자기소개서는 그렇다 쳐도 연구계획서는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깊이 조사하고 고민해서 진리를 따져 보는 일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었다. 막연히 입학하면 그런 걸 하겠거니 짐작했었는데 그걸 되려 내게 묻다니. 어렵게 쥐어짤 재주가 없어 나름대로 풀어봤다. 왜 지원했고 무엇을 배우고 싶고 어떻게 활용할 건지. 서류전형 합격 소식에 그럼 그렇지로 반응했다. 내가 자격이 돼서라기보다는 성실하게 임하기만 하면 통과될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다음 단계의 심층 면접을 앞두고도 걱정이 없었다. 거의 뽑아 놓은 후보자와 인사하는 정도라고 치부했으므로.


"최근에 어떤 논문을 읽었나요?" 인터뷰의 첫 질문부터 숨이 막혔다. 그룹 면접 참가자 중 나를 빼곤 모두 한국어 교사 또는 연구자로 일하는 현역이었다. 복장도 단정하고 차분한 장소에서 본격적으로 임하는 그들을 보고 흠칫했다. 일정도 조정하지 않아 외부에 나와 있던 나는 주차장의 차 안에서 겨우 접속해 있었으니까. 식은땀을 훔치며 최소한 솔직하게 답변하며 응했다. 하지 않은 건 안 했다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다 빼고 나니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열심히 하겠습니다' 밖에 남지 않았다. 순식간에 면접관이 사라진 화면을 응시하다 불안해져 검색을 시도했다. 답답한 정보가 계속 튀어나왔다. 국립국어원에서 인정한 유일무이한 온라인 대학원이라 경쟁률이 높아 재도전하는 사례가 많다고. 서류 불합격은 비일비재하고 논문도 미리 읽고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는 후기들. 누군가의 바늘구멍 통과라는 비유에 끝내 무너졌다. 파랑에게 고백했다. 떨어진 것 같다고.


기대하지 않았던 합격 소식은 누구나 가진 '혹시나' 덕분에 확인했다. 되고 나면 이유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가까운 가족이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누군가 가르쳐 본 경험이 있었고, 남들에게 없는 책을 출간한 경험이 독특했을 테니. 타지에서 외롭게 공부하면 힘들 거라는 경고에도 고독한 걸 좋아한다고 되받아치기도 했고. 안심과 기쁨이 섞인 결과를 감사하며 받아 들고는 모자란 머리를 채우기 위해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관련 커뮤니티와 사이트를 순회했고 도움이 된다는 책도 부랴부랴 구매했다. 산 책 일부의 일부를 겨우 넘겨 읽고는 새삼스레 한글의 위대함에 놀라기도 했다. 현장에서 사용된다는 한국어 교재가 대학생 시절 마주치던 외국인 학생이 어학당에서 배우던 거란 걸 알았다. 갑자기 그때 꽤 가깝게 지냈던 다른 나라의 이성 친구가 떠올라 추억에 잠기기도 하면서. 배운 적이 오래된 대학 졸업생은 다시 학생이 되는 절차를 조금씩 밟아나갔다.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던 학번이 두 개가 되었고, 언젠지 기억도 안 나는 마지막 수강 신청 이후 오랜만에 듣고 싶은 수업을 클릭했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 세미나라고 이름 붙여진 모임에 참석해서 넘치는 지식도 접했다. 새롭게 생긴 동기와 선배도 만났는데 역시나 어마어마했다. 대부분 깊은 경력과 경험을 가진 실력자였고, 나 같이 이도 저도 아닌 이는 없었다. 잘못 왔나 싶어 덜덜 떨고 있을 때, 특색 있는 연구는 다양한 배경에서 비롯된다는 어떤 선배의 위로 같은 응원에 기대어 정신 차릴 수 있었다. 밖에서 바라볼 때와 안에서 듣는 이야기는 천지 차이였다. 영어시험, 졸업시험, 과제, 발표, 실습, 논문 등 끝없는 할 일이 펼쳐졌다. 한 학기가 끝날 때마다 휴학생이 늘어난다는 통계적 사실 앞에 다시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제때 졸업하는 게 지상과제가 돼버리는 게 당연해 보였다.


나는 아직 선생님이 아니었지만, 모두가 선생님으로 불렀다. 꿈이었던 교사가 되기도 전에 불리는 어색한 호칭은 정중한 거절을 받을 때나 듣던 거라 움찔했다. '귀한 원고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희와 맞지 않아 반려합니다. 선생님.' 계속 듣다 보니 찜찜함은 사라졌고 괜히 진짜로 그렇게 된 것처럼 기분이 날았다. 시작하면 체력이 관건이니 개강 전까진 그냥 쉬라던 선배의 조언처럼 별 걸 하지 않았다. 뭘 해야 할지도 몰랐지만. 시간이 흘러 오리엔테이션과 입학식이 진행되고 멀리서 날아온 교수님 말씀이 뇌리에 박혔다. 공부하는 과정은 무척 힘들겠지만, 하고 싶다고 해서 왔으니 들어오지 못한 사람 몫까지 열심히 하라는. 돌아가며 나누는 짧은 자기 소개말에 동감을 넣어 외쳤다. 직접 선택한 결정이니 도망치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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