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이 넘도록 3월은 색채가 없는 달이었다. 더 이상 교복을 입는 일도, 새 친구를 만나는 일도 없는 열두 달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던 일을 하던 곳에서 계속하며 자리를 지켜내느라 급급했다. 오랫동안 무색무취하던 시기가 급격히 달라진다. 새로운 공부가 시작되며 봄날의 대학 교정처럼 생활의 풍경이 변한다. 비록 밟는 땅과 스치는 바람은 느낄 수 없지만 기분은 어느 때보다 산뜻하다. 출발하는 마음은 이토록 설렘을 몰고 온다. 배우는 걸 모자란 구석을 보인다고 여겨온 탓에 속 시원하게 부족하다고 드러낸 적이 없었다. 대놓고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학구열을 불태우며 하얀 머리띠를 두르자 속이 편해진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상태는 오히려 평안을 준다. 이해하지 못하고 답하지 못해도 상관이 없다. 모른다고 연거푸 말해도 손가락질할 자가 없어 개운하다. 아쉽게도 달콤한 무지의 자유는 길지 않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어쩐지 대학원 공부는 좀 널널할 줄 알았다. 첫 학기에 듣는 과목이 2개 6학점에 불과했고, 온라인으로 듣는 강의는 편안할 거라 예상했다. 공부를 안 해본 티는 개강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줄줄 난다. 매주 공개되는 수업은 정해진 시간을 사용하면 들을 수 있다. 문제는 듣는다고 아는 게 아니라는 데서 발생한다. 다양한 경로로 모르는 걸 확인한다. 수강하는 순간에는 알아들었는데 바로 잊어버리거나, 긴가민가해서 여러 번 곱씹어 이해하고 나서 좀 나중에 까먹거나, 들을 때부터 몰라서 계속 모르는 상태를 유지하거나. 주 양육자와 글 쓰는 자아만 가지고 있다가 학생이 추가되어 어렵게 시간을 내서 배우려는데 모래에 물 붓기가 따로 없다. 분명 보고 듣고 읽어도 곧 사라진다. 하도 신기해 어차피 기억을 못 하는데 공부해서 뭐 하나 싶어 아주 안 하는 게 낫겠다는 무책임의 경지까지 다녀온다. 증발하는 지식 앞에 스트레스만 잔뜩 쌓다 한숨 자야겠다며 눈을 붙이고 나면 좀 풀리긴 한다. 다만 그나마 묻어있던 얄팍한 정보도 몽땅 날아가 새사람이 되는 단점이 있을 뿐이다.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한 수업은 모국어, 즉 한국어로 진행된다.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냐면 그런데도 머리에 남는 게 너무 적어 점검하는 차원이다. 평생 쓰던 말로 배우는 데도 뇌를 스쳐 가기 일쑤다. 잡아두려고 뚫어져라 쳐다보며 애를 쓰지만 그럴수록 남기는커녕 더욱 헷갈린다. 소귀에 경 읽기가 이런 거구나 알게 된다. 나보다 먼저 회사를 그만두고 타지에서 공부했던 아내, 파랑이 새삼 대단해 보인다. 강의 듣고, 과제하고, 시험 보고, 실습하며 한 번의 삐그덕 없이 무사히 졸업을 해냈는데 그땐 그게 큰일인 줄 몰랐다. 큰돈 주고 다니는 학교이니만큼 적당히 따라만 가면 된다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알아서 하겠거니 했다. 지금 난 그 '적당히'가 전혀 안 된다. 심지어 파랑은 우리말도 아닌 외국어로 배웠는데도. 뒤늦게 그때의 부실했던 태도를 그녀에게 사과하며 오랜만에 하는 공부가 쉬운 게 아님을 하릴없이 인정한다.
교수님의 친절한 설명을 받아먹기도 힘든데 할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조별과제, 발표과제. 수업 교재로 받아쓰기를 해도 자신이 없는데 문제를 읽고 답해야 한다니. 대학원에서는 소논문 양식으로 과제를 제출해야 한다는데, 논문이라곤 취업을 결정지어놓고 대학 졸업을 하기 위해 제목이 기억 안 날 정도로 날림으로 쓴 게 전부인데. 아직 들이닥치기도 전이었지만 압박을 느끼며 불안에 떨기 충분하다. 벌어지지 않은 일로 덜덜거리며 움츠러들고 있는 와중에 생각지도 않은 숙제가 계속 떨어진다. 똑같은 요구를 여러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받았는데, 바로 자기소개하기. 선배를 만나도 동기를 만나도 교수님을 뵈어도 끊임없이 나를 설명해야 한다. 직접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황이라 영상 속에서 말을 하거나 글로 써야 하는데 두서없이 몇 번 하다가 아예 문장으로 박아버린다.
안녕하세요. 신입생 홍석준입니다. 호주에서 지냅니다. 현재 한국에서 다니던 IT 회사(마케팅 직무)를 휴직하고 아이를 돌보는 주 양육자로 살고 있습니다. 학부는 이과 계열로 졸업하였으며 한국어 교원 자격증은 물론 관련 공부를 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회사를 쉬면서 아들에게 한글을 3년 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제 생각을 글로 표현하며 기회가 닿아 책을 2권 출간했고, 올해도 해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직접 교육 현장에 서 있지 않아 경험은 없지만 관심이 생긴 분야가 있습니다. 저희 아이와 같이 외국에서 자라고 있는 어린 한국 아이들이 대상인데요. 부모가 가정에서 한국어를 사용하지만, 바깥 영어 환경에 살아가면서 점점 한국어를 잃어가는 상황을 목격합니다. 가족 간에 한국인으로서의 유대를 연결하고 공감대를 바탕으로 깊은 대화를 원하지만, 배울 수 있는 여건이 쉽지 않아 점점 멀어지는 걸 봅니다.
석사 과정을 시작한 이유는 안타까운 현장을 향한 관심과 제 아이를 길러낸 경험을 연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이었습니다. 주변에 필요한 손길이 제가 되어서, 더욱 즐겁고 편안하게 한국어와 한글을 배울 수 있도록 애를 써보고 싶습니다. 조금이라도 어릴 때 기초를 닦아 놓아 고유의 한국 문화를 즐기는 모습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제가 아이와 공유하는 한국의 기쁨을 더 많은 가족이 느끼길 바랍니다. 거기에 더해 한국어를 좀 더 진득하게 이해하여 글로 담는 실력이 높아지길 원하는 욕심도 있습니다. 녹록지 않을 앞으로의 배움의 길이 제 희망을 밝혀주길 기대합니다.
가장 먼저 가까운 파랑에게 보여주니 어쩐 일인지 감동적이라는 평을 남긴다. 나를 잘 담았다는 동의로 이해하고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가져다 사용한다. 멀리서 서로의 배경을 읽으며 관심과 응원을 보내는 관계가 따뜻하다. 어지간하면 타인을 돌아보지 않는 세상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따스한 시선을 받는 건 좀처럼 접하기 힘든 경험이니까. 선착순 신청을 통해 맺어진 상담 지도 교수님께도 나를 알린다. 기대하지 않은 답장을 받아 들고 감동한다. 자신의 첫 해외 출장지도 내가 있는 곳이었다며 그때의 찬란한 날씨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의미 있는 공부를 결심한 거라며 나의 꿈과 노력을 지지했다. 공부하기도 바쁜 와중에 괜히 시간 낭비하며 애꿎은 날 들여다보나 싶던 걱정이 날아간다. 덕분에 이 자리에 서 있는 나의 마음을 확인한다. 시작부터 흩어지려 했던 의지를 모으는 값진 기회로 쓴다.
가다듬은 정신을 붙잡고 다시 공부로 돌아오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스승과 처음으로 만나는 실시간 세미나. 목적은 학기 말에 발표할 개인과제를 선정하기 위해. 원하는 주제를 고르고 희망자가 겹치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이유를 대는 공개경쟁 방식인데 흥미진진하다. 애초에 나만 고를 것 같은 항목을 고르고 자신 있게 손을 드는데 웬걸. 2명이 더 원하는 바람에 원치 않는 자기 홍보를 해야 한다. 들은 이야기, 떠오른 상상, 읽은 책 등을 총동원해서 어필하지만 결과는 탈락. 민망하지만 관련된 유사 주제를 제시해 주신 배려 덕분에 얼른 혼자서 냉큼 받아먹고 마무리한다. 사실 얻은 건 따로 있다. 나같이 학부 전공이 아니거나 경험이 없는 학생이 입에 달고 사는 핑계가 있는데, 바로 '저는 전공이 아니라서 잘 몰라요.' 전공 학생이 된 이상 이 말은 금지라고 한다. 이젠 엄연히 전공자이며 모르는 부분은 스스로 채워가야 한다고. 공부는 질문과 의심으로 시작하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욕심내면 조바심이 생겨 그만두게 되니 천천히 설렘을 간직하며 걸어가자고 격려한다. 서두르지 말라는 귀한 말씀을 꼬옥 품에 안은 덕분에 오래전에 받은 과제 주제는 한 발짝도 진도가 나간 게 없다.
게으름과 싸우다 겨우 멀리 내팽개치고 일어나려던 무렵, 애매한 기류가 느껴진다. 대학원도 학생회가 있고 앞선 이가 주도하면서 이끌어간다. 각종 행사를 주관하고 활기를 넘치게 한다. 엠티와 같은 말인 모꼬지도 기획하고 학술제도 열며 단합을 도모한다. 다 좋지만 누군가 학업 외에 품을 들여야 하는 게 문제다. 나 같이 졸업만 하기도 벅찬 이들은 고개 돌릴 틈도 여력도 없으니. 동기 대표 및 임원을 선출해야 한다는 선배의 권유에 모두 눈치만 본다. 나 역시 말 한마디 하면 시킬까 봐 답답해도 참는다. 결국 보다 못한 착한 동기 한 명이 나서 대표를 뽑기 위한 온라인 미팅을 진행한다. 결과는 4분의 1만 참석한 처참한 상황. 절반도 오지 않아 아무것도 정하지 못하고 머쓱하게 헤어진다. 결국 선배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임원진이 어떤 역할을 하며 선배 기수에서는 어떻게 뽑게 되었는지 듣는다. 누군가 총대를 메고 봉사하는 마음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연한 설명. 두 번째 모인 자리에서도 누구 하나 나서는 이가 없다. 기껏해야 못 하는 이유를 줄줄 읊는 정도. 나는 그마저도 주목이 될까 봐 딴짓만 하다가 조용히 퇴장한다.
불편한 자리를 피한 것만으로도 상쾌해서 잠을 청하려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하나둘 우리도 잘해보자며 으쌰으쌰 거린다. 누군가 임원진의 역할을 정리하고 입후보를 받는다. 다른 누군가는 솔선수범해서 임원을 지원하며 독려한다. 눈치 보던 자는 나뿐이었는지 동조하며 들썩거린다. 다들 나처럼 공부하기도 바쁘니 괜한 일에 뛰어들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나. 그러거나 말거나 눈 한번 질끈 감고 내 일 아니라며 잠이 든다. 무언가 켕겼던 모양인지 평소보다 일찍 깨서 밤새 오고 간 뜨거운 대화를 응시한다. 울컥대는 마음 깊은 곳을 느끼면서 고민한다. 단숨에 결심하고 툭툭 탁탁 글을 남긴다.
안녕하세요. 호주에 있는 홍석준입니다.
학기가 시작되자 다들 정신이 없고 마음은 바빠져서 무어라 말 한마디 보탤 여유가 사라집니다. 괜히 나서면 이것도 해야 할 것 같고, 네가 말했으니 저것도 시킬 것 같고요. 저는 그래서 침묵을 지키느라 힘들었네요. 돌아가는 상황에 할 말이 많지만 참은 거죠. 하하.
요 며칠 감동하며 마음이 움직인 건 이곳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내고 영차영차 하는 모습이 좋아서였어요. 저같이 내가 아니어도 어떻게 될 거라며 한 발 빠져있는 사람보다는, 어떻게든 해보자는 분들이 더 많더군요. 우리 동기를 살아있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어요. 고맙습니다.
아, 이러고 감사하지만 나는 모르겠다며 빠지는 건 아니고요. 비어있는 자리에 지원했습니다. 다른 빈자리도 잘 채워지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비어있는 임원 한자리에 덜컥 앉는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