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혼자 내버려 두어도 터져버리기 직전인 상태. 미루다 미루다 이렇게 돼버린 건지 아니면 어쩌다 보니 몰려와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지만. 쳐다보기만 해도 헛구역질이 나오는 일의 홍수에 정신을 잃기 딱 좋을 때가 종종 찾아온다. 이런 날은 온 세상이 나를 가만히 두어도 견뎌내기 어렵다.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사라져 버릴까 고민까지 하게 된다. 어렵게 정신을 잡아와서 머리에 꽂고 차분하게 눈앞의 일더미를 마주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할 수 있다. 아니, 해야 한다.' 주문을 속으로 108번 딱 외우고 시작하려는 그 순간. 그 공간에 있는 다른 존재가 말을 건다. '좋은 아침!'
순수한 안부 인사다. 그것도 신경이 거슬리는 날카로운 내가 안쓰럽지만 어쩔 수 없다. 나 스스로도 베일 것 같은 상황이다. 차분하게 그에게 상황을 설명한다.
어마어마한 눈 아래 있어서 움직일 수 없듯이 일이 너무 많아서 파묻혀있다고 했다. 산더미처럼 쌓여서 죽을 것 같다고. 정말 겁나게 많아서 오늘의 나는 예민할 예정이라고. 대충 알아듣는 눈치다. 힘내라며 옆자리에 가서 조용히 앉는다. 비슷한 표현도 있다.
내 접시에 뭐가 많이 올려져 있다는 말이다.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 많다는 같은 뜻이다. 접시를 깰 수 없으니 열심히 먹어 치워야 한다.
잠시 후 그가 슬슬 시동을 건다. 잠시도 조용히 있지 못하는 그는 내 집중력 최대의 적이다. 다른 날은 그러려니 해왔는데 오늘은 내가 살고 봐야 한다. 이 사람 저 사람과 크게 통화하고 오고 가는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게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그러다 그가 선을 넘었다. 지난번에 내가 처리한 일을 가지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다.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조언을 빙자한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이미 다 끝난 일을 도대체 왜 지금 이제 와서 그러는 건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제발 난리 좀 치지 말아 줘! 지금 네가 아니어도 충분히 힘들다. 억지로 없는 장면(Scene) 만들어서 남의 이목 끌지 말아 주렴. 원하면 영화는 집에 가서 혼자 찍으렴. 정색하니 좀 잠잠해졌다. 다시 쌓여있는 일과의 씨름으로 돌아와서 낑낑대기 시작한다.
얘는 오늘 날을 잡고 왔나 보다. 갑자기 자리를 청소하고 정리하며 야단법석이다. 도대체 왜 지금이냐고! 평소에 하지도 않던 쓸고 닦기를 진심으로 행하고 있다. 우당탕탕 뽀득뽀득 아주 난리다. 전문 청소 업체 저리 가라다. 일이 없으면 집에 가주라 제발... 참다못해 최후의 통첩을 날린다.
조금만 더 건드리면 난 미치고 팔짝 뛸 거란 예고다. 'Flip'은 홱 뒤집다는 뜻이기에 여기에 'Out'을 더해 완전히 젖혀서 날아가는 상황을 말한다. 이성을 잃고 꼭지가 돌고 눈이 뒤집힐 것이라고 했다. 급분노와 극대노를 한꺼번에 경험하고 싶지 않으면 제발 멈춰달라고. 한 번도 없었던 내 이런 가공할만한 경고에 덜덜 떨고 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다. 너도 살고 나도 살려면 이 일들을 오늘 안에 끝내야 한다. 내 이성이 날아가지 않게 도와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