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가지고 있는 것엔 감사하지 않다. 없어본 적이 없으면 소중한 줄을 모른다.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손에 넣지 못한 걸 헤매 다니느라 살뜰히 살펴본 적도 없다. 잡은 물고기엔 눈길을 덜 주는 이치다. 익숙함보다는 새로움의 충격이 강렬하다. 포근함보다는 설렘이 가슴을 뛰게 한다. 쟁여두었다는 안전함을 인식하진 못하지만 그 덕에 편안히 지내는 경우가 흔하다. 절박한 배수진보다는 판돈 넉넉한 배팅이 확률이 높은 이유다. 고마움을 모르고 당연하게 살아가는 우리다.
상황이 바뀌는 건 품어왔던 내 것을 다른 이에게 내어 줄 때다.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가치를 모른다. 전해받은 타인의 감탄이 들리면 어색해하며 고개를 돌린다. 정말 그 정도라고? 그때야 비로소 진가가 눈에 들어온다. 곁에 두었을 때는 눈 뜨고 뭐 하느라 몰랐을까 싶다. 나만 쏙 빠진 화기애애한 관계가 속상하다. 이미 줘 버린 걸 다시 찾아오기도 어렵다. 웃돈을 얹어주고 찾아오는 모양새는 어울리지 않는다. 심지어 대상이 물건이 아니고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친구가 넋이 나갔다. 꽁냥꽁냥 거리던 게 얼마 전인데 그새 대차게 차였다. 술병에 빠져 밥도 못 먹고 며칠째다. 이러단 옆에서 내가 먼저 우울증에 걸릴 판이다. 전 여친의 흔적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는 모습이 짠하다. 더 심해지면 무단 침입이라도 할 태세다. 안 겪어본 상황이 아니라서 이해는 한다. 왜 우리는 아닌 줄 알면서도 이별을 겪을 때마다 세상이 끝났다고 여길까. 말이 안 통하는 상황이니 의미 없는 설명이겠지. 일단 사람은 살려야 하니 특약을 처방하자.
녀석의 풀려있던 초점이 이제야 돌아왔다. 급 관심을 보인다. 대책 없이 질러놓았는데 제대로 낚았다. 그렇게 좋은 사람을 알면 왜 내가 혼자겠니라는 진실한 농담을 던지면 안 되는 타이밍이겠지. 스무고개 하듯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하는 녀석을 안심시켜두고 돌아섰다. 더 생각을 해보나 마나 내가 아는 여사친은 한 명뿐이다. 지금 하는 걱정은 걔를 좋은 사람이라고 둘러댄 거짓말의 수습에 대해서다. 요즘 집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느라 씻지도 않고 밖으로 안 나오려 할 텐데. 사람 하나 살리자는 취지로 딱 한 번만 힘써달라고 해야겠다.
신신당부를 쉴 새 없이 했다. 제발 나 만날 때처럼만 하고 나오지 말라고. 머리고 감고 샤워도 하고 손에 닿는 옷 말고 좀 골라서 입고. 의외로 쿨하게 알겠다며 끄덕이는 녀석이 더 이상했다. 귀찮다고 몇 번은 튕길 줄 알았는데. 이성에 관심도 없는 놈이 무슨 바람이 분 걸까. 사정이 딱하니 착한 마음으로 나오는 거겠지? 아무튼 오늘만 멀쩡하게 등장해서 내 체면도 살려주고 차여서 영혼 없는 이놈도 하루만 구제해 주면 소원이 없겠네. 어, 들어온다.
자, 소개해 줄게. (입 다물어 미친놈아) 어제까지 힘없이 늘어져있던 녀석이 온몸에 생기가 돈다. 커다랗게 떡 벌어진 입을 닫지도 않고 활짝 웃으며 인사하고 악수하고 난리다. 별로 내가 필요 없는 상황이다. 둘 다 어서 가보라고 눈치를 준다.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쟤가 그 정도로 눈부신가? 자리를 뜨기 전 슬쩍 보니 신경을 많이 썼다. 저런 옷은 물론이고 화장한 모습도 처음이다. 그래 봤자 평범한 수준인데. 실연의 상처가 눈을 멀게 할 정도로 컸던 걸 테지. 애들도 아니니 알아서들 하겠지. 난 할 일 다 했으니 개운하네!
묘하게 흘러간다. 한 번의 분위기 전환으로 정신만 차리게 해 주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소개팅 이후 다음에도, 또 그다음에도 계속 만나고 있단다. 양쪽에서 전해 듣던 소식은 점점 희미해지더니 더 이상 내게 들어오지 않는다. 몇 명 없는 친구가 서로 만나니 난 만날 사람이 없어졌다. 심심한 마음보단 이게 뭘까 싶다. 어딘가 뻥 뚫려서 허전하다고나 할까. 뭐가 비어있는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떡벌입 녀석이 여전히 크게 벌리고 인사하며 다가온다. 저기요, 전 여친 다시 못 만나면 한강에 뛰어들겠다던 그 사람 맞나요?
앉기도 전에 칭찬을 늘어놓는다. 사기캐, 엄친딸. 완벽하단다. 뭐하나 빠질 게 없이. 어떻게 이런 다 갖춘 분을 여태 꽁꽁 숨겨두고 살았냐고 놀라워한다. 나를 평생의 은인으로 삼고 충성하겠다는 맹세도 거침없다. 한동안 멈추지 않을 녀석을 바라보며 딴생각에 빠진다. 그래 네 말이 맞지. 걔가 부족한 게 없지. 마음도 선하고 얼굴도 괜찮고 몸매도 건강하고 배려심도 깊고. 자기 생각도 있으면서 남의 말도 잘 들어주고. 부모님께 잘하고 주변에도 착한 일 많이 하고. 다 알고 있었는데 남에게 들으니 왜 이리 생경할까. 이성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건 그저 편해서였을까. 아니면 언제든 원하면 만날 수 있다는 자만심으로? 있을 땐 모르던 아쉬움이 가고 나니 생기는 걸까. 술은 이제 내가 먹어야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