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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Oct 20. 2024

늘 가까이 있었기에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엔 감사하지 않다. 없어본 적이 없으면 소중한 줄을 모른다.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손에 넣지 못한 걸 헤매 다니느라 살뜰히 살펴본 적도 없다. 잡은 물고기엔 눈길을 덜 주는 이치다. 익숙함보다는 새로움의 충격이 강렬하다. 포근함보다는 설렘이 가슴을 뛰게 한다. 쟁여두었다는 안전함을 인식하진 못하지만 그 덕에 편안히 지내는 경우가 흔하다. 절박한 배수진보다는 판돈 넉넉한 배팅이 확률이 높은 이유다. 고마움을 모르고 당연하게 살아가는 우리다.


상황이 바뀌는 건 품어왔던 내 것을 다른 이에게 내어 줄 때다.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가치를 모른다. 전해받은 타인의 감탄이 들리면 어색해하며 고개를 돌린다. 정말 그 정도라고? 그때야 비로소 진가가 눈에 들어온다. 곁에 두었을 때는 눈 뜨고 뭐 하느라 몰랐을까 싶다. 나만 쏙 빠진 화기애애한 관계가 속상하다. 이미 줘 버린 걸 다시 찾아오기도 어렵다. 웃돈을 얹어주고 찾아오는 모양새는 어울리지 않는다. 심지어 대상이 물건이 아니고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좋은 사람 소개해 줄게


친구가 넋이 나갔다. 꽁냥꽁냥 거리던 게 얼마 전인데 그새 대차게 차였다. 술병에 빠져 밥도 못 먹고 며칠째다. 이러단 옆에서 내가 먼저 우울증에 걸릴 판이다. 전 여친의 흔적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는 모습이 짠하다. 더 심해지면 무단 침입이라도 할 태세다. 안 겪어본 상황이 아니라서 이해는 한다. 왜 우리는 아닌 줄 알면서도 이별을 겪을 때마다 세상이 끝났다고 여길까. 말이 안 통하는 상황이니 의미 없는 설명이겠지. 일단 사람은 살려야 하니 특약을 처방하자.


I’ll set you up with someone nice.


녀석의 풀려있던 초점이 이제야 돌아왔다. 급 관심을 보인다. 대책 없이 질러놓았는데 제대로 낚았다. 그렇게 좋은 사람을 알면 왜 내가 혼자겠니라는 진실한 농담을 던지면 안 되는 타이밍이겠지. 스무고개 하듯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하는 녀석을 안심시켜두고 돌아섰다. 더 생각을 해보나 마나 내가 아는 여사친은 한 명뿐이다. 지금 하는 걱정은 걔를 좋은 사람이라고 둘러댄 거짓말의 수습에 대해서다. 요즘 집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느라 씻지도 않고 밖으로 안 나오려 할 텐데. 사람 하나 살리자는 취지로 딱 한 번만 힘써달라고 해야겠다.





입이 떡 벌어졌다


신신당부를 쉴 새 없이 했다. 제발 나 만날 때처럼만 하고 나오지 말라고. 머리고 감고 샤워도 하고 손에 닿는 옷 말고 좀 골라서 입고. 의외로 쿨하게 알겠다며 끄덕이는 녀석이 더 이상했다. 귀찮다고 몇 번은 튕길 줄 알았는데. 이성에 관심도 없는 놈이 무슨 바람이 분 걸까. 사정이 딱하니 착한 마음으로 나오는 거겠지? 아무튼 오늘만 멀쩡하게 등장해서 내 체면도 살려주고 차여서 영혼 없는 이놈도 하루만 구제해 주면 소원이 없겠네. 어, 들어온다.


His jaw dropped. (jaw : 턱)


자, 소개해 줄게. (입 다물어 미친놈아) 어제까지 힘없이 늘어져있던 녀석이 온몸에 생기가 돈다. 커다랗게 떡 벌어진 입을 닫지도 않고 활짝 웃으며 인사하고 악수하고 난리다. 별로 내가 필요 없는 상황이다. 둘 다 어서 가보라고 눈치를 준다.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쟤가 그 정도로 눈부신가? 자리를 뜨기 전 슬쩍 보니 신경을 많이 썼다. 저런 옷은 물론이고 화장한 모습도 처음이다. 그래 봤자 평범한 수준인데. 실연의 상처가 눈을 멀게 할 정도로 컸던 걸 테지. 애들도 아니니 알아서들 하겠지. 난 할 일 다 했으니 개운하네!





완벽한 사람


묘하게 흘러간다. 한 번의 분위기 전환으로 정신만 차리게 해 주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소개팅 이후 다음에도, 또 그다음에도 계속 만나고 있단다. 양쪽에서 전해 듣던 소식은 점점 희미해지더니 더 이상 내게 들어오지 않는다. 몇 명 없는 친구가 서로 만나니 난 만날 사람이 없어졌다. 심심한 마음보단 이게 뭘까 싶다. 어딘가 뻥 뚫려서 허전하다고나 할까. 뭐가 비어있는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떡벌입 녀석이 여전히 크게 벌리고 인사하며 다가온다. 저기요, 전 여친 다시 못 만나면 한강에 뛰어들겠다던 그 사람 맞나요?


She is the total package.

She ticks all the boxes. (tick : 체크박스에 표시하다)


앉기도 전에 칭찬을 늘어놓는다. 사기캐, 엄친딸. 완벽하단다. 뭐하나 빠질 게 없이. 어떻게 이런 다 갖춘 분을 여태 꽁꽁 숨겨두고 살았냐고 놀라워한다. 나를 평생의 은인으로 삼고 충성하겠다는 맹세도 거침없다. 한동안 멈추지 않을 녀석을 바라보며 딴생각에 빠진다. 그래 네 말이 맞지. 걔가 부족한 게 없지. 마음도 선하고 얼굴도 괜찮고 몸매도 건강하고 배려심도 깊고. 자기 생각도 있으면서 남의 말도 잘 들어주고. 부모님께 잘하고 주변에도 착한 일 많이 하고. 다 알고 있었는데 남에게 들으니 왜 이리 생경할까. 이성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건 그저 편해서였을까. 아니면 언제든 원하면 만날 수 있다는 자만심으로? 있을 땐 모르던 아쉬움이 가고 나니 생기는 걸까. 술은 이제 내가 먹어야겠는데.





오늘의 근본 없는 영어 3가지 정리


I’ll set you up with someone nice.


His jaw dropped.


She is the total package. / She ticks all the boxes.








<Prologue>

<Interlude>

<Epi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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