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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Oct 16. 2024

빼앗긴 관심을 똑같은 복수로

너무 자연스러워서 할 말을 잃을 때가 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라는 생각조차 할 틈 없이 물 흐르듯 매끄럽게 지나가면 어버버 하며 말을 잇지 못한다. 꺼내지 못한 아쉬움은 쌓이고 쌓여 깊숙하게 간직된다. '네가 그럴 줄이야.'라는 표현을 쏟아낼 타이밍을 놓치고 나면 혼자 끙끙대며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맹수처럼 눈을 부라리며 지낸다. 내게만 있었을 것 같은 일이 모두에게 있었던 일이길 바라며 여과 없이 남긴다. 어디부터가 겪은 일이고 들은 일인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는 즐기는 이의 몫으로 맡겨둔다. 고혈압이거나 심장이 약하신 분, 노약자 및 임산부는 피하시길 빌어본다. 





내게 올 관심을 가로챘어


오늘만 기다렸다. 바쁜 삶 속에 어렵게 연락이 닿아 모일 수 있는 시간을 겨우 만들었다. 어른이 되면 큰일이 있어야만 얼굴을 본다더니 정말 그렇다. 이게 도대체 몇 년 만인가. 준비한 자리에 오래 알고 지낸 얼굴들이 하나둘씩 등장한다. 나와 예비신부를 축하하는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와 하나씩 이름을 적으며 정성껏 준비한 청첩장을 건넨다. 모두 자리에 앉아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으며 우리 커플에게 집중된 스포트라이트를 한 껏 즐기려는 찰나. 들썩이며 무언가를 잔뜩 꺼내는 심상치 않은 그 녀석의 모습이 눈에 포착된다. 설마... 머쓱하게 웃으며 따로 자리를 마련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손에 든 익숙한 그것을 하나씩 돌린다. 받는 사람의 이름도 없는 또 다른 청첩장. 심지어 날짜가 우리보다 빠르다. 친구들은 먼저 결혼하는 그의 소식을 서둘러 축하하며 우리를 서서히 잊어간다. 옆자리의 그녀 얼굴은 돌이 되고 내 마음엔 불길이 치솟는다.


You stole my thunder!


남이 천둥을 가로챘다는 이 표현은 18세기의 속상한 영국 극작가의 사연에서 시작된다. 그의 연극은 무대에 오르자마자 실패해서 바로 다음 연극으로 교체되었는데 그가 고안해 낸 천둥소리 효과음은 평이 좋아 계속 사용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그가 '내 천둥을 훔쳐갔다!'라고 평을 남기면서 퍼져나간 슬픈 말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은 도대체 무엇인가. 기쁜 자리에서 화를 낼 수도 없고 날 위한 자리를 내가 먼저 정리할 수도 없는 괴로운 시간이 모임 내내 이어진다. 마치 처음부터 그를 위해 모인 듯한 애매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불편함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리한 내 짝보다 얼굴이 가려져 있는 그의 그녀가 더 많은 질문을 받는다. 우리에게 왔어야 할 당연한 관심을 악랄한 그의 수작에 모조리 빼앗긴다.





저기압이다


활활 타오르는 날 뒤늦게 알아챈 친구들이 수군대기 시작한다. '야야, 지금 이럴 상황 아니다. 우리 석준이 위해서 모인 거잖아.' 애써 정신을 차려보려는 그들도 내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이미 난 정신을 놓았다. 내가 가야 할 길은 그 길 하나뿐이다. 그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마음을 날카롭게 간다. 쓱쓱 갈아대는 소리를 주변에서 눈치채기 시작한다.


He is on the warpath.


'warpath'는 말 그대로 전쟁하러 나가는 길, 바로 출전의 길을 말한다. 목숨을 걸고 싸우러 가는 사람의 기운이 어떻겠는가. 살기로 가득 채워 기세 등등한 모양새는 주변을 압도한다. 제대로 한 판 해보려는 분노가 흘러넘친다. 아직 폭발하진 않았지만 누가 봐도 화가 많이 나있는 모습. 흔히 '저기압'이라고 부르는 초사이어인 변신 직전의 온몸을 찌푸린 상태를 말한다. 정확히 내가 그렇다. 





복수할 거야


그 이후 누가 묻지 않아도 미친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린다. 이대로 당할 순 없다고. 모든 신경이 하나에 쏠려 있다. 어떻게 돌려줘야지 이 절절한 억울함이 풀릴지. 이미 예의, 도덕, 매너, 상도덕은 버린 지 오래다. 상대가 그런 거 없는 덤비는 데 혼자 고집하는 건 미련한 짓이다. 이를 갈며 계속 왼다. 불현듯 방법이 떠오른다.


I’m going to get even.


똑같이 해주겠다는 다짐이다. 당한 대로 갚아준다는 결심, 바로 복수다. 앙갚음할 수 있는 그날이 찾아왔다. 그 녀석의 결혼식 날. 피로연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당연히 그의 결혼을 축하하러 모였다. 그와 삶의 반경이 비슷했기에 나도 대충 다 아는 얼굴이다. 식을 마친 신랑 신부가 한복으로 곱게 차려입고 하객에게 답례인사를 하러 한 바퀴 도는 순서다. 몇 달을 기다려 온 나는 가장 적확한 순간까지 참고 참는다. 그들이 내가 있는 테이블에 도착하자마자 문제의 그것을 꺼내 주변에 돌리기 시작한다. 곧 있을 내 결혼식 날짜가 박힌 청첩장을 그와 나의 공통된 지인에게 턱 하니 건네며 인사를 전한다. 이미 끝나버린 결혼식의 주인공들은 난색을 표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무도 관심 없는 헛된 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떠난다. 분명히 보았다. 자기가 한 일을 후회하는 녀석의 흐트러지는 얼굴을. 벼려왔던 장면이 완성된다. 





오늘의 근본 없는 영어 3가지 정리


You stole my thunder!


He is on the warpath.


I’m going to get even.








<Prologue>

<Interlude>

<Epi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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