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이 없을 때는 좋다. 신경 쓸 일이 없으니 편안하다. 딱히 기쁜 일도 힘든 일도 없이 흘러가면 재미는 없지만 골치 썩을 일도 없다. 다른 사람과 지낼 때도 마찬가지다. 비슷비슷한 처지로 만나서 고만고만하게 알고 지내면 관계는 평탄하다. 이렇다 할 특별한 일 없이 흘러가면 따로 부딪힐 일이 없다. 좀 지겹고 심심할 수는 있지만 사는 게 원래 이런 거라며 함께 어깨동무하고 크게 한숨 쉬며 지낼 수 있다. 영원할 것 같던 따분함은 종종 일찍 깨지기도 한다. 균열은 한쪽이 경로를 벗어날 때 생긴다.
나름의 계기로 내면의 각성을 통해 좀 다르게 살아보려고 하면 옆에서 크게 동요한다. 아름다운 방향으로 영향을 받아 나도 변해 봐야겠다 하면 참 좋겠지만 그런 일은 드물다. 어제까지 함께 세상을 탓하고 욕하던 친구가 다시 태어나겠다며 날뛰는 모습이 어색하고 못마땅하다. 멀쩡하게 지내다가 모든 걸 뒤집어엎고 새로운 삶의 목표를 세우는 모습에 자극받는다. 긍정적인 자극이 아니라 얘는 왜 갑자기 설치는 걸까 하며 이해하지 못한다. 자꾸 너저분한 풀썩거림이 계속되면 결국 참지 못하고 내뱉게 된다. 엉덩이를 들썩거릴 때부터 해주고 싶었던 머릿속 가득했던 그 말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엄청나진 않았어도 큰 무리 없이 잘 살고 있었는데 얘는 왜 이러는 걸까? 새로운 꿈, 새로운 목표. 다 좋다. 예전과는 달라질 거라고 선언하고 일찍 일어나서 행동하고 쓸데없는 짓 안 하고 생활하겠다는 너의 계획 인정한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네가 세운 그 목표는 너무 오버 아닌가? 닿기 어려운 높은 지점을 향해 갈 수는 있지만 그래도 정도껏 해야지... 네 까짓게 말이야.
해 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어디서 머리를 세게 맞고 온 것처럼 행동하는 녀석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이 정도까지 솔직하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뭐 그래도 친구라면 쓴 말도 해 줘야겠지. 사람은 자기 주제를 파악해야 하고 분수를 알고 살아야 하지. 생각한 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살면 그게 사람인가, 동물이지. 우리 모습을 봐라. 지금 네가 꾸는 꿈이 가당키나 한 건지.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지. 안 그래?
충격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응원할 줄 알았었는데. 모두가 비웃어도 너는 다를 줄 알았었는데. 그래서 하나도 남김없이 느끼고 깨달은 걸 솔직하게 털어놓은 건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기댔던 너에게 크게 한 방 맞으니 정신이 없네.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을 때 쓰는 말이다. 'do a number on'은 권투 중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잽, 훅, 어퍼컷 등 주먹 종류마다 번호를 매겨서 구분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아프게 하고, 피해를 주고, 심각하게 조롱한다는 의미다. 토닥여주고 안아줄 거라고 믿었던 내 편에게 제대로 얻어터지니 당황스럽다. 깊숙이 패인 고통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
녀석을 피한다. 볼 때마다 던지는 주먹에 겨우 잡은 의지가 계속 무너져서. 정말 이번엔 달라지고 싶다. 나로 가득 찬 나만의 삶을 살아보고 싶다. 거창한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후회 없이 바라는 바를 향해 할 수 있는 걸 다 해보고 싶다. 이런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저 친구는 쉬지 않고 정신 차리라고 하는 걸까. 누굴 때린 것도 죽인 것도 아니고 내 꿈을 향해 달려가겠다는 것뿐인데. 왜 답답했던 지난날로 날 데려가지 못해 안달인 걸까. 더 이상은 못 참겠다.
계속 참다가 머리 꼭대기까지 찼다는 말이다.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다. 생뚱맞은 'the last straw(마지막 지푸라기)'는 낙타 등에 이미 짐이 많아서 지푸라기만 더 올려도 주저앉고 말 거라는 속담에서 유래한다. 네가 어디서 뭐라 떠들고 다니든 알 바 아니지만 나를 붙잡아 넘어 뜨리려는 태도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내가 왜 그런 소리를 계속 들어야 하는데? 아무 희망 없이 아무 노력 없이 멍하니 살다가 이제야 정신 차리고 살아보겠다는 데 그게 그렇게 널 힘들게 하니? 옆에 붙어서 맨날 바보같이 남 탓만 하던 사람이 없어지니 심심해서 그러니? 난 이제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내 곁에서 사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