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 심었다.
하나는 살아 있고 또 하나는 그렇지 않다.
귀농
사람을 옮겨 심는 일이다.
사람세상에서 자연의 비율이 많은 곳으로 넘어가는 일이다.
귀농이란 표현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움직였음에도 하는 일이 너무 앞장서 있는 느낌이다.
귀농했냐고 물으면 그냥 이사 왔다고 한다.
이불 보따리 싸 가지고 왔으니 이사를 한 것이다.
월북한 것도 아니고 같은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왔을 따름이다.
영어를 쓰는 곳이 아니니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없다.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풀어 나가면 될 일이다.
큰 변화이긴 하지만 아프리카로 넘어가듯이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다.
다만 떠날 이유보다 시골로 들어 올 이유는 있어야겠다.
떠나는 것은 하루에 불과하니까.
귀농을 위해 준비는 필요하다.
그 준비라는 것 때문에 귀농 관련 단체에서 교육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교육이 필요한 걸로 치면 강북에서 강남으로 또는 반대로 이사하는 경우가 더 그렇다.
귀농과 관련하여 머리로 배우는 교육에는 한계가 있다.
귀농교육을 하는 사람에게도 시골이 그 사람의 삶에서 어떤 그림으로 남아 있는지도 모르고 교육과정에서 괜한 선입관만 생길 수 있다.
직업을 바꾸는 것이기보다는 삶을 움직이는 일이기에 자신을 임상실험을 해보았으면 한다.
마음에 둔 지역이 있으면 그곳에서 봄여름 가을 겨울 한 사이클을 몸도 마음도 함께 겪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뜨내기 같은 마음이 아니라 실제상황 같은 감정이입이 필요하다.
남에게 말하기 위한 것 말고 바로 자기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다면 나중의 의사결정을 위해서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별을 보고 텃밭에서 싱싱한 상추를 따먹고 좋은 공기를 마시고 하는 일도 다 좋지만 그것들이 일상이 되었을 때, 별이 별로 안 보이고 공기도 그게 그거인 익숙함이 찾아왔을 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시골의 삶 자체를 좋아하는지 일 년간 자신에게 때때로 물어보았으면 한다.
화가가 멋이 있고 작품을 비싸게 팔 수 있다 하더라도 화가는 무엇보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야 할 테니까.
의지는 바닥날 때가 있다.
농사일은 배우면 될 일이고 나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춰본다.
혼자 있는 시간을 잘 견딜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남에게 기대어, 남으로 인하여 기쁨을 얻거나
표현이 자신을 지탱하는 경향이 있다면 신중했으면 한다.
외로운 게 좋다고 말하는 것과 외로운 상황을 실제로 견디는 거와는 거리가 있다.
또한 시골의 남도 도시의 남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오히려 시골에 사는 이들이 주는 시각적인 정겨움이 때로는 내용으로 연결되지 않을 때 기대가 실망으로 변한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고 사람 따라 다 다르다. 도시, 시골과 같은 지역의 문제가 아니다.
자연과 자기 자신만을 배경화면으로 놓는 것이 실제에 가깝다.
그리고 좋은 인연이 있다면 감사한 일이다.
일에 대한 자신의 호흡을 물어봤으면 한다.
단거리에 강한 지 장거리에 강한 지를.
어떤 이들은 머리만 쓰는 일을 하다 보니 몸을 놀려 땀 흘려 일하는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다.
갈 수 없는 건너편이 그립다는 얘기에 불과하다.
사과나무 한 그루에 일 분씩 머무르다 보면 똑같은 일을 삼일 동안 하게 된다.
일 분을 머물러 무슨 일을 하겠나를 생각해 보면 일주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한 끊임없는 반복이 자신에게 맞는 지를 생각해 봤으면 한다.
도시에서와 같이 목표치를 머릿속에 두고 일을 하면 일의 양에 눌려서 제 풀에 지치게 된다.
농사일이 즐거워서 춤까지 출 수야 없겠지만 온전하게 견딜 수 있는 정도면 되겠다.
시골에서의 삶에 대해 가치판단은 가급적이면 안 하는 것이 좋겠다.
자신에게 맞는지 안 맞는 지만 생각하면 된다.
우열의 문제가 아니다.
시골에서의 삶이 도시의 삶보다 가치적으로 우월한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이 인생의 방편으로 선택한 것이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 인분의 이야기다.
확장하여 무슨 ~주의까지는 가지 않았으면 한다.
자녀를 좋은 대학에 입학시킨 학부모가 그 결과에 터 잡아 과정까지 미화시키는 "나는 이렇게 키웠다" 같은 책을 떠올리게 된다.
시골에 들어와서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은 경북 사투리로 "왜 왔니껴?"이다.
농사 지으러~라고 얘기하면 대부분 아쉬워하는 눈치다.
온 이유보다는 자극적인 떠난 이유를 듣고 싶어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시골로 들어오는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온 이유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광화문 네거리의 소나무가 귀농에 대해 생각할 말미를 주었다.
나 자신이 어느 나무에 속할지는 아직은 모르겠다.
- 어느 분이 주신 덧글에 대해 올렸던 답글을 더 합니다.
귀농인, 토박이와 같이 떼거리를 나누는 그런 구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넘어왔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변방에 와서 나팔소리 불어대는 이 들 때문에 귀농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기도 합니다.
도시에서의 차이를 시골에서 반대로 느껴보려 하는 슬픈 모습들이 보이곤 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님의 생각과 같습니다.
사람이 살아온 세월이 다르면, 다른 건 다릅니다.
농사를 짓지 않던 사람의 농사와 평생 해오던 이의 농사는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농업인은 이래야 한다고 정해진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각자의 삶에 비추어 각자가 농사라는 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면 될 일입니다.
억지로 같아져야 하는 것만큼 어색한 일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