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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ace b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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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이 생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백지로 하얗게 비워내고 싶다.

그리곤 새로 채워 넣고 싶다.

일부는 남겨 놓고 싶기도 하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좋은 기억들, 자랑스러웠던 순간들은 쪼금만 남겨 놓으면 안 될까?

그 눔의 미련이 남는 걸 보니 초기화는 안 되겠다.

말이 그렇지 앞으로 새로 채워 넣을 일을 생각하니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삭제, 잘라내기 버튼으로 해결해야 할 것 같다.

무엇을 휴지통으로 보낼까?

안 좋았던 시간도 뒤집어 보면 좋은 점도 있는데, 거기에서 많이 배우기도 했는데..

하나하나를 놓고 고민하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

지난 시간을 정리하는데 지금의 시간을 허비하는 게 마땅치도 않다.

그래, 압축을 해야겠다.

지난 시간이 정리가 안 되니 새로운 것이 들어올 공간도 비좁다.

꽉꽉 눌러 압축을 잘해서 보관해 두어야겠다.

사과즙도 만들어 보았는데 이것쯤이야.

어느 날, 지난 시간이 떠오를 때 잘 찾아볼 수 있도록 꼬리표는 잘 달아두어야지.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디지털 시대에는 잘할 수 있을 때까지 글도 다시 쓸 수 있고 사진도 다시 찍을 수 있지만

삶은 예외인 것 같다.

'다시' 버튼이 그림만 있지 눌러보면 눌러지지 않는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가슴으로 온전히 끌어안고 갈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삶이 삶다운 것 같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지난 시간이 흔쾌하지 않다면 각도를 조금 틀어 남은 날들을 걸어가는 일이다.

11시나 1시 방향 정도.. 그동안이 좀 그랬다면 과감하게 3시 방향 직각으로 꺾으면 된다.

작동하지 않는 '다시' 버튼을 자꾸만 누르면 버튼의 글자만 닳아 없어진다.


거리와 지하철의 광고판을 성형광고가 채우고 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성형에 대한 끌림이 있는 것 같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삶의 성형에 대해서까지도 그렇다.

완전히 다른 사람을 만들어 버리는 성형광고 사진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다면, 그러면 나는 누굴까?

이름

얼굴

주민번호??

아니면

직업

학교

역할인가..

이 또한 바뀔 수 있다면 외형이나 표식도 아니고, 대체 나는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선택하고 감당하고 걸어온 그 모든 시간들의 더하기, 그 合이 바로 나라는 생각을 해 보니 마음이 편해진다. 새롭게 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새해 아침부터 '다시 다시'를 외칠 필요 없이 연말이 되면 조용히 올 한 해를 더하면 되겠다.


올 한 해는 예쁜 한 해를 만들어 보고 싶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다 보면 지난 시간과 섞여 내가 조금 예뻐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새해 첫날에 펼쳐 든 다이어리에서 나는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가 참 좋다.

어릴 때 그림을 망쳐버린 나에게 엄마가 '한번 더 그려봐라' 하고 내민 새 도화지 냄새가 난다.

오늘 아침 오 투비 팜의 땅과 하늘과 나무들과 하물며 강아지들과도 새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유쾌한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럴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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