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컬트 장르를 잘 못 본다
워낙 호불호가 갈리는 장르. 하지만 그래도 너무 보고 싶었다. 결론은 용기내길 잘했다. 생각보다 잔인한 장면은 없었다. 단지, '악마'와 관련된 저마다의 잔인한 삶이 있었을 뿐이다. 줄거리가 생각보다 간단하다. 의미를 실은 장면들에 충분히 호흡할 시간을 주어 연출된 의도를 찬찬히 생각하며 따라갈 수 있다. 그 와중에 유머도 한 스푼 있다.
소년을 구하고자 모인 사람들
유니아 수녀는 '기도빨' 잘 받는 '검은 수녀'다. 구마 의식 덕에 붙은 이름이다. 악마의 끝판왕쯤 되는 '십이형상' 중 하나가 나타났다. 그것도 맑디 맑은 10대 학생 몸에. 소년의 집은 진작에 풍비박산났다. 소년은 자기 몸을 물 속에 내던진다. 이 고통이 끝날까 하여. 하지만 육신이 없어진다고 악마가 죽지 않는 것을 미처 몰랐다. 누덕누덕 기운 틈새로 칼바람이 처들어오는 소년의 마지막 보호막 엄마마저. 악마의 농간으로 저 세상으로 가고. 이제 소년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그런 소년의 곁을 유니아가 지킨다. 유니아는 외롭다. 교구에서는 감히 서품도 안 받은 수녀가 구마 의식에 설친다고 무시한다. 정작 필요한 협조는 기대할 수 없다. 소년의 새 주치의는 악령 들리는 일 따위는 맏지 않는 정신과전문의 신부. 소년에게 필요한 건 약물과 상담 치료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주치의의 제자가 바로 미카엘라 수녀다. 미카엘라는 위태롭게 두 세계 사이에 서 있다. 두 수녀의 태생적 공통분모와 소년을 위한 마음이 모여 드디어 구마 의식이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샤머니즘, 타로 점괘 등이 뒤엉키며 세계관이 확장된다. 소년의 곁에 남은 이들은 사명감을 짊어진 두 명의 수녀, 혼란하고 무력한 한 명의 신부, 그리고 아직 부적조차 쓰지 못하는 '영빨 없는' 한 명의 애기 무당이 전부다. 구마 의식은 성공했다. 소년를 구해내는 것이 목표라면.
그 방법 뿐이었을까
어렵사리 악마를 소년의 몸에서 완전히 꺼냈다. 그리고 봉인된 곳이. 왜 하필 유니아 수녀의 몸 속이었어야 했을까. 보고 나서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영화가 대체로 함축이 많았다. 그녀는 아마 장미수도회와 접촉할 때부터 각오했을 것이다. 타국에 있는 스승의 전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년을 구할 것. 그러나 수도회의 입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마를 제거할 것. 설령 그것이 소년의 몸을 해치더라도. 어쩌면 그 지령을 받았을 때부터 마음 먹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 말고 어차피 죽을 이 내 몸에 악마를 가두기 그리고 내 기도로 소멸시키기. 그렇게 내 한 몸보다 소년을 더 귀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까칠하고 시크하지만 사명감이 전부인 그녀의 생을 이토록 잘 보여주는 설정이 없겠구나. 거기에, 구마 과정에서 마주한 악령이 저주를 퍼부은 인간의 몸에 갇혀버린 꼴이니. 어찌 보면 악마가 한 번 더 지는 것 같기도 하고. 소년이 무사해지고 유니아가 위험해진 순간, 불길로 걸음을 내딛는 유니아 수녀의 몸에서는 악령의 기운이 뻗친다. 마지막 순간 그녀의 눈물과 눈빛. 악마와의 기싸움에서도 지지 않는 강인한 그녀가 사실은 무척 두려워하고 있구나, 사실은 살고 싶지 않을까 하는 고뇌가 진하게 전해졌다. 그래서인지 소년이 평화를 되찾은 해사한 얼굴로 감사인사를 건넬 때 (꿈처럼 묘사됨) 평상복 차림의 유니아 수녀 다리 사이로 흐르는 피는 흡사 순교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머지
소년의 목숨은 하루가 다르게 위태로워진다. 하지만, 교구는 예의 '행정', '절차'만 중시한다. 나대는 수녀 때문에 신부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핀잔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남성과 여성이 대비되는데, 극에서 문제를 주도적으로 물고 늘어져 끝내 해결하는 이들이 여성이라는 점이 신선하다. 음악이 좀 독특했다. 법문 같다가 라틴어 기도문 같다가 그러면서도 대중음악 같은 음악이 존재할 수 있다니(엔딩 크레딧에서 나온 음악). 아울러, 송혜교 씨의 연기에 감탄했다. 음성이 너무 좋았다. 첫 대사부터 자연스럽게 관객을 몰입하는 힘이 있다. 기도문을 제외하면 대사가 많지 않은데 대사마다 임팩트 있게 남는다. 과하지 않다. 그녀의 다음 장르물이 기대된다. 이 밖에, 제목 '검은 수녀들'에서 '은'의 니은 받침이 굉장히 날렵한 곡선인게 눈에 띄었다. 내 눈엔 유니아 수녀의 단호한 턱선, 수녀복 머리 장식의 곡선, 치맛 자락의 곡선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이상, 오늘도 여운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두서없이 적어보는 리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