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얼마나 좋아해?
=응?
-나를 얼마만큼 좋아하냐구.
=아마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단 조금 더 많이.
-아니, 안돼. 그런 흔해 빠진 멍청한 대답은. 여자들이 이런 질문을 할 때는 말이지, 조금 더 그럴듯한 걸 원한다구.
=가령, 예를 들면?
-음. 어디 보자. 아니, 잠깐만. 내가 왜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해야 해. 그건 멍청한 자기 몫이라구.
=흠. 복잡한데, 여자들이란. 어쨌든 좋아. 다시 한번만 물어봐줘.
-나를 얼마나 좋아해?
=태양의 하늘만큼 네가 좋아.
-응? 하늘의 태양만큼?
=아니, 태양의 하늘만큼 말이야. 그만큼 네가 좋아.
-그러니까 하늘에 있는 태양을 말하는 거야?
=어릴 적에 말이야. 막연히 하늘에 올라가면 태양을 눈 앞에서 볼 수 있을 줄 알았어.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 처음 타 본 비행기에서 계란 모양의 창을 통해 내 오른쪽 무릎을 달구고 있는 태양을 문득 올려다보게 됐거든. 태양은 하늘의 하늘에서 그 눈부시고 따뜻한 빛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어. 아마도 하늘에게 또 하늘이 있는 것처럼 태양에게도 하늘이 있겠지. 그 태양의 하늘만큼 딱 네가 좋아. 지구적인 차원을 넘어 전 우주가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네가 좋아. 너는 너의 하늘만큼만 나를 좋아해 주면 좋겠어. 그리고 너는 내게 태양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너와 태양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너를 택할 거야. 왜냐하면 지금은 밤이고, 너와 나는 같은 침대에 있고, 태양도 지금은 잠을 자야 하니까 말이지.
-음, 뭔가 복잡하긴 하지만 나쁘지 않네. 이 정도면 합격.
=고마워. 그런데 말이야. 이렇게 지금, 여기에서, 너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어쩐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어쩐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
-나도 비슷해. 만약 여기가 낯선 타국의 여행지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라 생각해. 만난 지 삼일밖에 되지 않은 남자랑 한 침대 위에 있으리라곤 나도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걸.
=하지만 말이야. 나는 비행기에 탈 때마다 쭉 상상해 왔어. 누군가 멋진 여성이 내 옆자리에 앉았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날 방콕행 비행기의 내 옆자리에 바로 네가 앉은 거야.
-그리고 너는 지금과 다름없는 멍청한 얼굴로 내게 물었지. 혹시 안녕하세요가 태국말로 뭔지 아세요 하고. 내가 최근 몇 년간 본 얼굴 중에 가장 우스운 얼굴이었어. 초면에 웃을을 참느라 정말 혼났다구.
=어쩔 수 없었어. 나는 그때 '상상하기'를 넘어서 '저지르기'라는 여행의 새로운 경지로 접어드는 중이었거든. 알랭 드 보통이란 작가가 그의 책에서 여행의 거의 모든 즐거움은 '상상하기'에서 온다고 말해. 왜 공항에서 도시의 이름들이 타라라락 하고 넘어가는 순간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기대감에 부푸는 것 말이야. 하지만 내 경우에 상상으로 가득했던 여행들이 늘 만족스러웠던 건 아니었거든. 그리고 그날 나는 마침내 내 옆자리에 앉은 낯선 여성에게 말을 거는 상상 대신 그것을 직접 실행하기로 한 거야. 그리고 깨달았지. 상상과 실행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걸 말이야.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여행'이라는 특수한 상황이었기에 가능했겠지만 말이지.
-아무려면 어때. 어쨌든 이제 자기가 치킨을 먹을지 피시를 먹을지 결정할 차례야.
=응?
잠에서 깬 내게 스튜어디스는 다시 한번 피시인지 치킨인지를 천천히 물었다. 나는 무심결에 내 옆에서 치킨을 먹고 있는 여성을 한 번 쳐다보고는 말했다.
-치킨 플리즈.
내 오른쪽 무릎 위에는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란 책이 놓여 있었고, 내 옆자리에는 조금 전 내 꿈에서 나와 같은 침대에 누워있던 여성이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2011. 08. 동남아로의 첫 해외여행과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대사 "봄날의 곰만큼 네가 좋아"가 모티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