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한 상상
"다시 한번, 해줘. 좀 더, 세게."
어쩐지 이런 말을 듣게 되면 못되게 굴고 싶어 진다.
"더 공손하게 말하지 못해! 무언가를 부탁할 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원하는 걸 구걸하란 말이야!"
마지막엔 험한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참기로 했다.
시선 아래로 보이는 하얀 등. 등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굴곡이 유난히 매끄러워 보인다. 내 턱을 타고 땀방울이 떨어지면 등의 미끄럼틀을 타고 순식간에 내려갈 것 같다. 나뭇잎을 스치는 이슬처럼.
절을 하는 것처럼 한껏 움츠린 하얀 몸이 부들부들 떨고 있다. 전혀 춥지 않은데도. 몸의 떨림이 잦아들고 하얀 몸의 주인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본다. 슬픈 듯하면서도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촉촉한 눈이 땀에 젖은 앞머리 사이로 얼핏 보인다.
"부탁해요. 다시 한번만 해주세요. 조금 더 세게. 저에게, 상을 주세요...... 아니, 벌을 주세요. 주인님"
그녀의 촉촉한 눈동자에는 그녀가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남자가 들어있다.
가끔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사실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고 전생이나 환생 따위를 믿지도 않지만), 그리고 만약 내가 무엇으로 다시 태어날지 정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하고.
여러 가지 선택항이 있겠지만 대전제는 하나다.
"지금과는 전혀 다를 것"
가끔씩 다시 태어나도 똑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럴 거면 귀찮게 뭐하러 다시 태아나나 싶다. 그 지루한 반복을 위해 엄마는 또 한 번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할 텐데 굉장히 이기적인 생각이다. 물론 지금의 삶이 그만큼 만족스럽다는 뜻이기도 할 테지만 어쨌거나 재미없다.
최악에는 언제나 그보다 더한 최악이 있듯이 최선에도 역시 그보다 더 나은 최선이 있을 텐데. 그리고 굳이 더 낫지는 않더라도 언제나 가지 않은 길은 더 매력적인 법이니까.
뭐 어쨌거나 그래서 내가 찾은 환생 후보 일 지망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매우 미인인 백인 여성'이다. 앞서 떠오르는 대로 상상해 본 '누군가의 주인님'인 삶도 나쁘지는 않지만 어디까지나 그런 건 취미 생활의 영역으로 충분하다.
다만 가능하면 지금 삶에서 축적된 기억과 지식은 그대로 가져가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남자라는 생물은 굉장히 단순하다. 지구에 사는 인간의 절반을 차지하고 스스로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멍청한 생물은 잘만 이용하면 여자의 삶을 무척 멋진 걸로 만들어 줄 수 있다. 스스로가 여자를 행복하게 만들어 줘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으며 또 그것에 무엇보다 큰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굳이 '시스템'을 바꾸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이 '남자'라는 것을 잘 이용하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인생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멍청한 생물을 우습게 보거나 경쟁 상대로 보고 이기려고 하면 삶이 피곤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적당히 어르고 달래면서 3번에 1번 꼴로 부탁을 들어주거나 달라고 하는 걸 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