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에 걸려서야 탈출한 개미지옥이지만
아직도 그들에게서는 탈출하지 못했다고 한다.
# 탈출 1년 전
관리부서에서 인사 관련 고충이 있으면 의견을 달라는 메일이 왔다. 해당 업무에 종사하면서 면역질환 판정을 받고, 여러 힘든 일들이 있었던 나는 정중하게 메일을 보냈고, 정중한 답변을 받았다.
-다음 인사발령 때 조치해 드리겠습니다.
안도와 감사함을 느끼며 메일을 보관함에 저장해 놓았던 좋은 기억도 잠시, 관리부서가 조정되면서 내가 속한 조직의 인사권을 다른 관리부서가 갖게 되었다. 의미 없는 메일, 의미 없는 기다림이 된 것이다.
관리부서가 바뀐 것뿐만 아니라 나의 고충을 알고 계시던 역장님도 바뀌게 되었다. 나는 새로 오신 역장님과 단둘이 상담할 기회를 만들어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역장님. 새로 오시자마자 이런 말씀을 드리게 돼서 죄송하지만, 관리역이 바뀌면서 다시 또 부탁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나의 사정을 듣던 역장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관리역에 이야기해서 조치될 수 있도록 할게요.
# 탈출 6개월 전
역장님은 종종 말씀하셨다.
-근데 엄청 급한 건 아니죠? 정말 미안한데... 대체자가 없어서 업무 이동을 도저히 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반년이 흘렀다. 내 직속 상사인 새로운 부역장이 왔다. 말을 가볍게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어디 아프다면서요?
나와 근무한 첫날 부역장은 말했다. 역장님께 무슨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상황을 가감 없이 이야기했다. 발령이 나길 희망하는 상황이니 직속 상사에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말을 가볍게 하는 성격이던 그는, 그 이후 툭하면 내가 아프다는 것을 쉽게 입에 올리며 걱정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을 했다. 쌓여가는 짜증이 폭발한 사건이 우스운 그 '컵라면' 사건이었다.
자리를 오래 비우기 힘든 업무 특성상 컵라면으로 점심을 대충 때우고 남은 점심시간이라도 편하게 쉬고 싶었던 나에게 그는 말했다.
-컵라면 그런 걸 먹으니까 병에 걸리지.
며칠 후 나는 그와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 남의 병을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 달라고. 그는 대답했다.
-내가 그런 말을 했어? 몰랐네. 그런 말을 했으면 내가 심했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는 나를 걱정하는 척 먹이는 듯한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음식을 들먹이지만 않았을 뿐이다.
# 탈출 3개월 전
나에 대한 걱정이 많은 부역장님께 부탁을 드려보기로 했다. 교대로 새벽 근무를 하자고 부탁했다.
-새벽 근무 어렵지 않아요. 그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지.
쉽게 호언장담하던 그의 얼굴은 한 달도 되지 않아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자기가 이렇게 '배려'라는 걸 해주는데 나는 왜 불만이 많은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배려'라는 단어에 나는 차갑게 말했다.
-진정한 배려는 제가 예전부터 부탁드린 인사발령이 날 수 있도록 윗선에 건의해 주시는 게 아닐까요.
같이 일하는 남직원과 맨날 내 걱정, 아니 걱정인 척하는 뒷담화할 시간이 있으면 윗선에 건의를 해도 백번은 했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매일 쉽게 뱉는 말에 지쳐가던 나는, 새벽 근무를 마치던 어느 날 아침 아침 생전 처음으로 심장에 통증을 느끼게 되었다. 스트레스와 불면으로 인한 통증인 것 같았다. 퇴근 시간 겨우 15분을 남긴 상태에서 더이상 나는 참을 수 없어 먼저 퇴근하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 이후로 그는 정말 심각하게 나의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저러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역장님
그 입을 꿰매면 병이 나을 것 같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 탈출 1개월 전
관리 부서의 장이 역에 와서 상담을 했다. 부탁하는 입장인 나는 죄인처럼 말했다.
-이 업무를 대신할 사람이 쉽게 생기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관리 부서가 바뀌기 전부터 인사이동을 희망하고 있었고, 여기서 근무하면서 질병을 알게 된 상황이라 개인적으로 많이 힘듭니다.
물론 제가 당장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대체할 사람도 없는데 무조건 당장 바꿔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업무가 바뀐다고 걸린 병이 낫는 것도 아니니까요. 다만 업무를 대신할 사람이 생기면 저를 우선적으로 바꿔주셨으면 합니다.
그 역시 나와 비슷한 면역 질환을 겪고 있었다. 그는 곧 발령을 내주겠다고 말하며 말미에 이런 말을 붙였다.
-진작 상황을 알았으면 더 일찍 바꿀 기회가 있었는데.......
# 개미지옥 바깥에서의 1년
내가 '죽는다고 난리를 쳐서 억지로 발령이 났다'는 소문과 함께, 나는 개미지옥을 탈출할 수 있었다. 나에게 남은 건 3개월에 한 번씩 받는 피검사와 회사에 대한 체념뿐인 듯했지만, 그래도 입을 꿰매고 싶은 사람들을 안 만나서인지, 심장이 아픈 일도 다시는 발생하지 않았고 집에서도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적어도 그의 면전에서는 가십으로 올리지 않는 부역장님과 근무하며 1년이 흘렀다.
하지만 역장님이 돌아왔다. 2년 전, 내 앞에서는 관리 부서에 인사이동을 이야기하겠다고 하고 이를 묵인하다가 상황이 심각해지자 어쩔 줄 몰라했던 분.
비둘기가 똥을 싸는 걸 차단하라는 민원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똥을 빨리 치우는 건 몰라도, 비둘기가 똥을 싸는 것 자체를 어떻게 차단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역장님은 열심히 차단봉 여러 개를 이은 뒤, 좁은 승강장에 넓게 바리케이드를 쳤다. 민원인들의 말은 부하 직원의 말과는 달라서, 무언가 조치한 모습은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전선 안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가까이까지 설치된 바리케이드는 사람들의 동선에 방해가 되어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툭툭 걸리고 있었다.
비둘기들은 이 커다란 바리케이드를 비웃기라도 하듯 바리케이드 밖에 연이어 세 방의 똥을 쌌다. 바리케이드 안에 똥을 싸기 두려워진 비둘기들은 사람들이 열차를 기다리는 안전선과 가깝게, 더 눈에 띄게 똥을 싸게 되었다.
나는 그 똥을 바라보며 우스운 생각을 한다. 개미지옥 밖을 나온 줄 알았던 나의 삶에도 여전히 똥은 떨어지는구나. 어떤 차단봉을 둘러도 나는 그들의 똥을 맞을 수 밖에 없구나. 더이상 에둘러 말할 필요도 없겠다. 피할래도 피할 수 없는 정말 더러운 것이 바로 회사 생활이었다. 그저 떨어진 똥을 치우며 살아가는 방법밖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