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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솔 Nov 23. 2024

집으로 가는 길

 하얀 터널

눈을 보면 떠오르는 건 더 이상 동화 속 하얀 세상이 아니다.

깨끗한 눈이 쌓인 한적한 들길이나 산길을 걸어본 지 까마득하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날들이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다. 한때는 설레던 첫눈이, 언제부턴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낭만은 사치가 되었고, 눈은 재앙이 되어 트라우마처럼 마음 한켠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날의 이야기를 담담히 꺼낼 수 있을 것 같다. 일본 홋카이도의 비에이 마을도 부럽지 않았던, 그날의 하얀 풍경을. 고양이들과 함께했던, 그 험난했던 집으로 가는 길을, 지금은 그저 웃으며 회상할 수 있는, 나만의 겨울 이야기를.




"와! 하늘이 너무 깨끗해! 마치 가을 같아. 미미야! 나비야! 어디에 있니?"

숲 언덕 쪽에서 미미와 나비가 대답하듯 냐옹 소리를 냈다.     

12월이지만 청명하고 따뜻한 날이었다. 읍내 유일한 동물병원까지는 자동차로 삼십 분이 넘게 걸린다. 서둘러 미미와 나비를 각각의 캐리어에 넣고 출발했다. 화창한 날씨 덕에 마음은 상쾌해졌다.     

산 정상에서 시작되는 구불구불한 산간도로를 달렸다. 천천히 운전하며 바라보는 풍경은 정겹고 편안하다. 길의 곡선을 따라 자연스레 움직이는 핸들, 그 움직임에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온해진다. 

도시의 운전자들에겐 불편하게 느껴질 길이다. 나에겐 오히려 작은 위안이 된다. 계곡을 따라 늘어선 감나무들은 이 계절의 풍경화다. 높은 가지에 달린 감들은 대부분 그대로 남아있다. 까치들의 겨울 양식이 되기도 하지만, 하얀 눈이 내릴 때면 붉은 감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읍내로 들어서자 기차역 앞 동물병원이 보였다.

"다 왔다, 얘들아. 오늘 잘 견뎌낼 수 있지?"

차에서 캐리어 두 개를 조심스레 내렸다. 미미는 놀란 듯 동그란 눈을 했고, 나비는 웅크린 채 작게 울었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서며 말했다.

"두 마리 다 암컷이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수의사는 수술이 끝나면 연락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물병원을 나와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출입문을 열자마자 새로 붙은 벽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검색에서 사색으로'

'사색'이란 단어와 나란히 있는 '검색'이 문득 낯설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낯섦이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졌다. 검색으로 해결되는 세상에서, 오늘만큼은 사색을 즐겨보기로 하자.     

빌려갔던 책들을 반납하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 펼쳐진 지붕 위의 풍경은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집저집 할 것 없이 가지런히 늘어선 곶감 줄이 마치 가을의 마지막 팔레트 같았다. 과일이 풍성한 이 고장에 산다는 건, 든든한 위안이 될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동네에 과수원이 많으니 과일은 사 먹을 일이 없었고 선물용으로 구입하는 것도 주소만 알려주면 되니 편하기도 했다.    

연말이 다가온다. 서울의 지인들에게 보낼 반건시 선물 명단을 적어보기로 했다. 몇 박스나 필요할까 궁리하며 이름을 하나둘 적어 내려갔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까의 청명함은 온데간데없고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고 있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할 즈음, 동물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있어 서둘러야 했다. 

읍내에 비가 내리면 우리 동네는 눈이 내린다. 겨울을 두 해 겪어보고야 알았다.

수술을 마친 두 마리의 고양이는 축 늘어진 채 소리 한 번 내지 못했다. 환부를 핥지 못하도록 머리에 캡을 씌우고 각각의 캐리어에 조심스레 넣었다.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에 계산을 하고, 주의사항은 대충 들은 채 인사를 하고 나왔다. 차에 시동을 걸며 하늘을 보니, 아침의 그 맑은 하늘은 온데간데없었다. 내 마음도 그랬다.     


읍내를 벗어나 황간면으로 들어설 즈음, 빗방울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는 이미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눈이 쌓이기 전에 올라가야 하는데..."

걱정스러운 중얼거림에 맞춰, 마취에서 깨어난 듯 고양이들이 희미한 소리를 냈다.

"미미야! 나비야! 조금만 참아..."     

49번 지방도로에 접어들었다. 무주까지 이어지는 이 산간도로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길이었다. 이 도로를 달려 해발 800m의 고개를 넘으면 설천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겨울이 되면 위험과 맞바꾸어졌다. 나의 집은 해발 700m의 고개를 넘기 전 마지막 외딴집이었다.

    

면소재지까지는 그럭저럭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비와 눈이 뒤섞여 내리다 녹아버리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산간도로로 접어들수록, 고도가 높아질수록 눈발은 거세졌다. 기온이 떨어지며 도로 위로 하얀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낮에 여유롭게 달렸던 그 길이 순식간에 하얀 설산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며, 힐링의 도로가 공포의 도로로 뒤바뀌는 아이러니에 쓴웃음이 났다.     

"아, 하필 오늘일까..."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들이 밖으로 나돌기 시작하면서 식구가 늘어났다. 이미 두 번의 출산을 겪고 나니, 더는 방치할 수 없어 중성화 수술을 결심했다. 동네를 떠도는 고양이들은 배고플 때면 어느새 우리 집 문턱을 넘어, 우리 고양이들과 한 그릇의 밥을 나누곤 했다. 더 이상의 번식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 집 암컷들만은 수술이 필요했는데, 하필이면 오늘이었다.     

눈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않은 건 순전히 내 불찰이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이어진 맑은 하늘만 믿었으니, 산중 생활의 첫 번째 교훈을 잠시 잊은 셈이다.    

 

차는 이제 우리 동네로 향하는 고갯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속도는 거북이만큼이나 더뎌졌고, 눈발은 마치 솜뭉치를 뿌리는 듯했다.     

"앞이 안 보여... 집까지 갈 수 있을까?"

불안감을 달래기라도 하듯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미미야, 나비야, 괜찮니?"

수시로 고양이들을 부르며 안부를 확인했다.     

이장님 댁을 지나 1km만 더 오르면 이 산골짜기의 마지막 집, 내가 사는 곳이다. 하지만 해발 600 고지의 이장님 댁을 겨우 지나 100m도 못 가서 자동차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몇 번을 더 시도했지만 무모한 짓이었다. 차는 이미 제 기능을 잃어버린 듯했다. 겨우 차를 길가에 세웠다.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하늘에선 함박눈이 쏟아져 내렸다. 이미 쌓여있던 눈 위로 무섭게 덧쌓이는 눈, 세상은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오직 하늘만이 끝없이 흰 눈송이들을 뿌려대고 있었다.     

산은 거대한 솜이불을 두른 채 도로 양옆으로 다가와 있었고, 눈앞의 도로는 한 점의 흔적도 없는 순백의 세계로 변해가고 있었다. 잠시 그 황홀경에 취해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니, 내가 이 막막한 설산에 홀로 서 있다는 사실이 두려워졌다.

차가운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고, 끝없이 내리는 눈은 세상을 하얀 장막으로 덮어갔다. 시야 속 도로는 자취를 감추었고, 엔진마저 잠든 이 순간, 오직 고요뿐이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불안이라는 감정이 가슴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들은 고개를 숙인 채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차가운 공기는 숨조차 막히게 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끝없는 물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시간이 갈수록 길은 눈으로 더욱 두꺼워졌고,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점점 깊어가는 적막 속에서 불확실한 상황은 마음을 더욱 옥죄어왔다. 창밖의 하얀 세상은 마치 나를 가두려는 듯 점점 더 높아만 갔다. 고립된 이 공간, 나는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현재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이장님 댁. 그곳으로 내려가거나, 아니면 우리 집까지 걸어 올라가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 사이엔 의지할 만한 집도 없었고, 이미 어떤 차량도 이 산을 넘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려 도움을 청할 곳조차 없었다. 차 안에서 망설이는 몇 분 사이에도 눈은 더욱 거세게 내렸다.     

집에 남겨둔 아기 고양이들이 걱정되었다. 밖에 있는 고양이들도 어디로 나가버리진 않았는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온 집 안의 상황이 떠올랐다. 결국 집으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수술을 마친 두 마리의 고양이가 문제였다. 아픔에 신음하는 저 아이들을 어떻게 데리고 가야 할지, 혹은 차에 두고 가야 할지 고민이 깊어졌다.     

차 문을 열어 고양이들의 상태를 살폈다. 그들도 무언가를 직감한 듯 동공이 커져 있었고, 좁은 캐리어 안에서 앓는 소리를 냈다. 쌓여가는 눈을 보니 일분일초가 아쉬웠다. 산에서 살면서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마음만 더욱 급해졌다.    

 

나는 고양이가 든 가방 두 개를 차에서 내렸다. 하나는 어깨에 메고, 다른 하나는 끌면서 조심스레 첫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눈은 이미 발목을 넘어 무릎까지 치솟았다. 하늘은 보이지 않았고, 쏟아지는 눈발 속에 시야마저 흐려졌다.     

저녁 6시, 하지만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이라곤 끝없이 쌓여가는 회색빛 눈뿐. 매서운 바람은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힘들게 했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성묘 두 마리를 데리고 가는 일은 깊어가는 눈밭에서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냐웅... 냐웅..."

고양이들은 내 상황을 이해하기라도 하듯 작은 소리로 신호를 보내왔다.     

"조금만... 조금만 더 힘내자!"

주문처럼 되뇌어보지만, 하얀 설산을 뚫고 가는 이 길은 마치 지옥으로 향하는 듯했다. 온몸은 땀으로 젖어들었고, 다리는 쑤시기 시작했다. 내 키의 3분의 1까지 쌓인 눈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마치 눈 속에 터널을 파듯 발로 눈을 걷어차며 나아가야만 했다.     

습기를 머금어 무거운 눈은 매 걸음을 고단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고양이 두 마리의 무게까지... 하얀 나무숲을 끼고 걷는 이 길이, 정말 지옥으로 가는 길인 걸까?

눈은 마치 쇠사슬처럼 발목을 붙잡았다. 몸은 이미 내 것이 아닌 듯했다. 집으로 가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을 이어갔다. 이 행위는 더 이상 걷는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처참하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땀을 타고 흘렀다.    

차가 멈춘 지점에서 집까지 1킬로미터, 처음에는 고요한 산속에 울리는 바람 소리와 눈을 밟는 축축한 소리가 낭만적으로까지 느껴졌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시작된 건 말 그대로 허우적거림이 되었다.



어느 순간, 귀를 기울여보니, 내가 내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산은 평소보다 더 깊고 차가운 침묵 속에 잠겨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세상의 모든 소리를 눈이 삼켜버린 것처럼.     

눈보라는 더욱 거세져 얼굴을 할퀴듯 매섭게 불어왔다.


 전화벨이 울렸다. 누구지? 받을 수가 없는데...

그때, 눈 덮인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툭, 툭 눈을 밟는 소리.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설마 하는 예감이 적중했다. 검은 물체가 눈보라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서로를 발견한 순간 얼어붙었다.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나는 고양이 캐리어를 바짝 끌어안고 주저앉았다.     

그때 그 녀석의 콧김이 하얀 입김이 되어 공중으로 피어올랐다. 우리는 잠시 서로를 응시했다. 그러다 갑자기 녀석은 몸을 돌려 옆 개울 쪽으로 움직였다. 눈보라 속에서 검은 덩어리가 개울을 건너 후다닥 내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맙다, 멧돼지야...

눈 속에 묻혀있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캐리어 안의 고양이들도 긴장이 풀렸는지 작게 울음소리를 냈다. 전화는 그새 끊겨있었다. 지금은 그것보다 한 걸음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했다. 이 절박한 순간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눈 덮인 지붕이 희미하게 보였다. 직감적으로 그곳이 내 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푹신한 눈 위에 그대로 누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고양이들만이라도 잠시 내려놓고 쉬고 싶었다.     

해발 700 고지, 집으로 향하는 입구에 도착해서야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거센 눈보라 속에서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어졌다. 불과 몇 걸음만 더 가면 되는데... 왜 이렇게도 힘이 빠지는 걸까.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보니, 내가 걸어온 길이 마치 하얀 설산을 관통하는 좁은 터널처럼 이어져 있었다. 발자국이 아닌, 한 사람의 처절한 의지가 만들어낸 터널... 그리고 그 너머로 하얀 어둠이 깊이 내려앉아 있었다. 고요와 적막을 뚫고 1킬로미터를 오르는 데 족히 두 시간이 걸렸다.      



마지막 남은 300미터의 계곡길은 오히려 천국으로 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지친 다리는 휘청거렸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단단했다. 어깨에 매달린 미미와 눈 속을 끌며 온 나비, 이 아이들은 오늘 나에게 특별한 선물을 준 걸지도 모른다. 차에 두고 왔다면 편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드디어 집에 도착해 문고리에 손을 얹었을 때, 그간의 공포와 불안이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문이 열리고 따뜻한 공기가 얼어붙은 얼굴을 감쌌다. 긴 여정을 마친 안도감에 그대로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그 순간 깨달았다. 흰 눈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니라는 것을.     

늦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밖은 마치 솜뭉치를 펼쳐놓은 듯 포근해 보였다. 어제 받지 못했던 전화가 궁금해 확인해 보니, 한국도로공사 제설차량 담당자의 전화였다. 이곳에 살면서 처음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 도로공사, 제설작업... 도시에선 몰랐던 분야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살아야만 했다.      

적설량을 물어보려 했던 전화를 받지 못했지만, 아침에 재어보니 60센티미터. 더 이상 눈은 내리지 않았다. 장독대의 항아리보다 더 높이 쌓인 눈을 보며 나는 새삼 자연의 위대함을 실감했다.     

그날의 폭설은 어쩌면 자연이 나에게 준 시험이었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과 마주하게 만든, 그리고 내가 지닌 의지의 크기를 확인하게 해 준 선물 같은 시험.

 "미미야, 나비야, 고마워! 집에 올 수 있었던 건 너희가 함께였기 때문이었어."     


산속 집에서의 겨울은 매년 폭설이라는 시련을 안겨주지만, 봄이 오면 그 모든 순간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된다. 마치 그날의 두려움과 고난을 이겨낸 후의 달콤한 승리처럼.



#사진: 오래전 산골마을에 살던 때에 찍어둔 겨울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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