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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솔 Sep 28. 2024

루루의 선물

가출

야, 누가 여기서 자래!

아침 7시, 정민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옆에서 들리는 가르릉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루루가 정민의 팔에 몸을 기대고 잠들어 있다.

"야, 누가 여기서 자래!" 정민은 투덜거리며 일어났지만, 일부러 루루를 깨우지는 않았다. 루루가 정민의 침대를 오르락거린 후부터 알레르기는 날로 심해져 갔다.

"이리 와 루루, 밥 먹어!"

정민의 목소리에 루루는 기지개를 켜며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정민은 커피를 내리며 루루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안 계신 삼 개월 동안 아침은 늘 커피 한잔으로 정신을 깨우고 나간다.

“오늘은 야근해야 할지도 몰라, 늦게 들어올 거야. 루루! 얌전히 놀아!” 정민은 루루를 바라보며 한마디 던진다. 루루는 정민을 한 번 쳐다보고는 밥그릇으로 얼굴을 돌린다. 정민은 알레르기 때문에 괴롭긴 해도 루루가 집안에 있는 것이 좋았다. 아무도 없는 집에 지쳐서 들어오는 시간이면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 것만 같다.

현관문을 열자 루루가 따라오려는 듯 꼬리를 치켜들고 걸어온다.

“루루, 넌 집에 있어야지,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내 침대에서 낮잠 자면 안 돼.!” 정민은 루루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후 문을 닫았다.

      

정민은 침실문을 열었다.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오후에 정민은 은주와 통화를 했다. 며칠 안으로 귀국할 것 같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가 없는 삼 개월을 혼자서 루루와 지내는 것은 정민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처음 한 달 정도는 스트레스가 많았다. 밥 주고 물 주는 것만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제아무리 깔끔한 고양이라도 똥오줌까진 스스로 해결하진 못하니까. 모래를 갈아주고 그 오물을 처리하는 일이 힘겨웠다. 이제 엄마가 오시면 숨 좀 쉴 수 있겠다 생각하며 정민은 기분 좋게 퇴근해 들어왔다.

루루는 거실에 없었다. 집사가 왔는데 내다보지도 않는 녀석, 하긴 인기척이 나면 먼저 몸을 숨기는 게 고양이니까. 정민은 침실문을 열었다.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루루가 침대 위에서 편하게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방문을 닫았다고 생각했는데 밀면 열리는 걸 보니 고장이었다. 고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앞서 짜증이 확 인다.

“야! 루루!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냐고!”

정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루루는 놀라 귀를 뒤로 젖히고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내가 매일 말하지 않았어? 여기는 네 자리가 아니라고!”

정민은 화가 나서 루루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쳤다. 루루는 겁에 질려 거실로 도망쳤다.

“아, 진짜...”

정민은 침대 위에 수북이 묻어있는 루루의 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눈이 가렵고 콧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이불을 거칠게 털어냈다. 그사이에 루루는 소파 밑으로 숨어들었다. 루루는 꼬리를 감싸 안고 중얼거린다.

'흥, 저 못된 집사 녀석. 엄마만 오시면 다 일러버릴 거야. 그럼 넌 호되게 얻어맞을걸? 엄마한텐 나밖에 없다고~‘ 루루의 눈은 복수심으로 빛났다. 



다음 날 아침, 정민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루루의 밥그릇에 사료를 채우고 물도 갈아주었다. 하지만 루루는 여전히 소파 밑에서 나오지 않았다.

'루루야, 미안해. 나와서 밥 먹자.' 정민의 사과에도 루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소파 밑에서 정민을 노려볼 뿐이었다. '엄마가 오시면 넌 끝장이야. 나한테 감히 손을 댔어?'      

정민과 루루의 냉전이 시작된 지 하루가 지났다. 정민이 출근하고 집에 없을 때는 사료도 먹고 물도 먹고 창밖을 내다보며 산책을 하는 루루, 그러다가 정민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 소파 밑으로 들어가 눕는다. 그런 루루를 보며 정민은 웃음이 난다. 주말에 공항으로 엄마를 마중 나가야 하는 정민은 어떻게든 루루와 화해를 하고 싶었다.

“루루, 내가 엉덩이 때린 건 잘못했어, 미안해~ 어서 나와봐 간식 줄게.” 그러나 루루는 꼼짝 하지 않는다.     


은주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루루!”하고 부르자 루루가 달려 나와 그녀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주말 오후 공항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정민은 그 북적임이 좋다. 마음이 설레고 뭔가 계획을 세우게 되는 분위기의 공항이 정민에겐 활력소가 되기도 했다. 

출구를 나오는 은주가 정민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정민은 활짝 웃으며 뛰어가 은주의 캐리어를 건네받는다. 은주는 정민을 꼬옥 안았다. 아니 정민의 널찍한 가슴이 은주를 잠시 품었다 놓으며. “고생하셨어요 엄마” 하고 말했다. “아들이 고생 많았겠네, 루루도 돌봐야 하고 혼자 일어나서 출근도 하고..” 은주는 정민의 어깨를 토닥이며 웃었다. “얼른 집에 가요, 루루가 기다려요” 정민은 루루가 신경 쓰였다.     


은주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루루!”하고 부르자 루루가 달려 나와 그녀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냐앙~ 냐앙~ 엄마! 드디어 왔다냥~' 은주는 루루를 안아 들며 웃었다. “아이고, 우리 루루. 보고 싶었어.” 그때 루루가 갑자기 울먹이는 듯한 소리로 냥냥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저 나쁜 녀석이 날 구박했다냥~. 내가 좋아하는 침대에서 쫓아내고, 오이껍질이랑 참외껍질도 안 줬다냥~' 루루는 싱크대위로 뛰어올라 수도꼭지를 핥으면서 냥냥 거렸다.

은주는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뭐라고? 정민아, 이리 와봐.” 하고 아들을 부른다. 캐리어를 끌고 들어오던 정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정민아, 너 루루를 그렇게 홀대했다면서? 왜 그랬어~ 잘 좀 지내지... 물도 안 갈아 줬니?”

정민은 어안이 벙벙했다. “엄마는 참, 무슨 소리예요? 밥 주고 물 주고 배설물 치워주면 되는 거지 뭘 얼마나 더 해요? 온몸이 가려워 죽겠구만...” 정민이 볼멘소리를 한다. “루루가 그러는데? 네가 자기를 때리고 구박했다고, 그리고 루루는 오이나 참외껍질을 좋아하잖아 한두 조각 주면 될걸 다 버렸어?”

“엄마! 설마 저 녀석이 냥냥거리는 걸 진짜 알아듣는 거예요? 엄마 없는 동안 제가 얼마나 잘 돌봐줬다고요.” 정민은 어이없어 웃는다. 루루는 은주의 품에 안겨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와! 이럴 수가...” 정민은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바람이 한올 지나간다. 문득 살짝 열린 현관문이 눈에 들어왔다.


은주와 정민은 루루를 달래 놓고 저녁 준비를 했다. 정민이 스테이크를 굽는 동안 은주는 샐러드와 와인을 준비했고. 루루에게도 특별한 간식과 좋아하는 오이 껍질을 주었다.

“정민아, 엄마 없는 동안 루루 보살피고 회사 다니느라 고생했어. 루루가 냥냥 거려도 네가 애쓴 건 다 알아. 알레르기도 심한데 진짜 고생했다.” 은주의 격려에 정민이 머쓱해진다.

두 모자는 은주의 여행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특히 은주의 친구가 살고 있는 롱아일랜드의 해변가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은주는 소설에 등장하는 마을은 설정된 가상의 마을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참, 정민아 너도 곧 결혼해야지? 엘리야 결혼하는 거 보니까 부럽더라" 은주는 친구의 아들 결혼식을 떠올리며 정민에게 묻는다. 정민은 은주의 이야기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뜻하지 않은 결혼얘기에 멋쩍게 웃는다. 

루루는 은주의 등 뒤에서 맛있는 간식을 즐기고 있었다. 바람이 한올 지나간다. 문득 살짝 열린 현관문이 눈에 들어왔다. '저 밖엔 뭐가 있을까?' 호기심 가득한 루루의 눈이 반짝였다. 잠시 망설이다 루루는 조용히 현관을 빠져나갔다. 아파트 복도에 선 루루는 잠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무엇에 이끌리듯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살포시 발걸음을 옮겼다. '위에는 어떤 세상이 있을까?' 루루의 모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고양이는 낯선 곳에서는 두려움의 소리를 낸다. 배고플 때와는 다른 소리다.

     

"정민과 은주의 대화는 끝날 줄 모르고 이어졌다. 정민이 새 접시를 가져오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열린 현관문을 발견하고 황급히 닫았다. “루루야?” 정민이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은주도 불안한 기색으로 루루를 불렀다. “루루야, 어디 있니?” 방과 화장실을 뒤져보고, 소파 아래와 냉장고 위도 확인했지만 루루는 어디에도 없었다.

“정민아, 문이 왜 열려 있었던 거야? 전에도 이런 적 있어?” 걱정스레 은주가 물었다. 정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까 캐리어 끌고 오면서 문이 열린 걸 확인 못했던 것 같아요. 혹시 열린 틈으로 나간 게 아닐까요?” 은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엄마, 난 위층으로 올라가 볼게요. 엄마는 아래층 좀 확인해 주세요.” 정민은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올랐다. “루루야! 어디 있어?” 은주도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루루를 불렀다. “루루야, 엄마야. 어서 나와!”

복도를 달리며 정민은 걱정에 싸였다. 불과 몇 분 전까지도 엄마 등 뒤에서 맛있게 간식을 먹고 있다고 생각했다. 잠깐 사이에 자취를 감출 수가 있을까? 위로 올라갔다면 20층에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데 왜 안보일까, 고양이는 낯선 곳에서는 두려움의 소리를 낸다. 배고플 때와는 다른 소리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없다. 정민은 루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문이 열린 집들이 있는지 조심스레 살폈다.   

은주는 아파트 정원과 주차장을 돌아보았다. ’왜 하필 내가 오니까 나가는 거니, 루루야, 내가 네 얘기 다 들어준 거 아니었어?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거니?‘ 루루는 보이지 않았다. 소리도 없다. 정민을 야단쳐 달라는 루루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좀 더 귀 기울여 줄걸... 야단치는 척이라도 할걸... 고양의의 말을 알아듣고 소통하기 시작한 걸 후회했다.

밤이 늦어 마냥 찾아다닐 수는 없었다. 은주는 힘없이 집으로 돌아오는데 정민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위쪽으로 올라가지는 않았나 봐요, 아래로 내려갔다면 2층이니까 금방 나갈 수 있었겠네요. 근데 집안 고양이가 밖에 나오면 울잖아요. 두려워서...” 정민이 초조한 듯 말이 빨라졌다. 은주는 말이 없다.

흥겨웠던 저녁 식사자리가 갑자기 썰렁해졌다. “이제 어떡하지...” 정민이 중얼거렸다. 은주는 아들의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 마, 꼭 찾을 거야. “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루루가 사라진 지 6개월, 정민의 일상은 평범해 보였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엔 루루의 공백으로 인한 상처가 생겼다. 루루의 사진을 프린트해서 전단을 만들어 아파트 동마다 붙여놓기를 한 달 정도 했지만 깜깜무소식이었다. 목덜미에 하얀 털과 하트모양은 루루의 큰 특징이라 누군가 루루를 보호하고 있다면 금방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어느 날 퇴근길에 정민은 아파트 앞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가을바람에 낙엽이 흩날리고 있었다.

 ”루루야, 넌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니? “ 혼잣말을 하면서 일어서려는 그때,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정민은 반사적으로 일어났지만, 곧 쓴웃음을 지었다. ”또 착각인가... “ 

회색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루루와 닮은 듯하면서도 다른 고양이였다. 정민은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고양이는 잠시 망설이다 정민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고양이를 쓰다듬는 정민의 손끝이 떨렸다. 눈물이 고여 시야가 흐릿했다. 

정민의 눈물은 루루에 대한 미안함과, 자신에 대한 용서였을지도 모른다. 이젠 그만 내려놓고 싶은 마음의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날 밤 정민은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다.


정민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별이의 목덜미에 하얀 털이 하트 모양을 하고 있었다. 마치 루루의 그것과 똑같이.     

루루는 이제 그의 가슴속 따뜻한 추억으로만 남기기로 했다. 루루가 집을 나가도록 일부러 문을 열어둔 것은 아니었지만 늘 자기 탓이라 여기며 우울했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정민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정민이 마음을 추수를 때쯤 다시 3개월의 여정으로 은주는 유럽으로 떠났다. 정민은 혼자였다. 루루가 없어 여유롭다는 생각보다는 혼자만의 생활이 뭔가 더 큰 것으로 꽉 채워지고 있다는 느낌으로 살고 있다. 저녁엔 산책하며 길고양이들을 위해 사료를 나눠주고 있다. 그리고 집안에서 고양이를 다시는 키우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대신 동물 보호소에서 한 달에 한번 봉사하기로 했다. 그로선 그것이 최선이었다.     


보호소에서 돌보는 고양이중 정민이 특히 예뻐하는 고양이가 생겼다. 한 달 전에 태어난 아기 고양이었다. 정민이 '별이'라고 이름 지었다. 별이와 함께 놀면서 정민의 마음도 조금씩 안정이 되어 갔다. 별은 루루처럼 회색 고양이었다. 어느 날, 별이를 쓰다듬다 문득 목덜미를 보게 되었다. 그 순간 정민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별이의 목덜미에 하얀 털이 하트 모양을 하고 있었다. 마치 루루의 그것과 똑같이.     

정민은 별이의 목덜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루루의 흔적을 찾아 헤맸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제 정말 괜찮아질 거야.' 

정민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별이의 털 위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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