늠름하게 걸어오는 노랑이의 털이 석양을 삼켰다.
내 걸음 뒤로 따라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부드러운 털을 오른쪽 다리에 슬쩍 비비면서 지나간다.
나한테 부비부비를 하고는 뒤 돌아본다. 간지러웠지만 기분이 썩 괜찮았다.
"네가 날 알아보는구나, 나에게서 너희들의 냄새가 나니?"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나를 따라오던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눈이 마주쳤다. 순간 녀석의 눈빛은 나를 빨아들이는 듯했다. 가늘고 애처로운 소리로
"냐앙~" 한다.
"배 고프구나? 네가 아무리 늠름해 보여도 지금은 배가 고프다는 거 난 알아."
녀석은 말똥말똥 쳐다보더니 다시 한번 부비부비를 한다.
전에 키우던 고양이들이 생각났다. 냥이들과 옹기종기 모여 함께 살았던 동네도 그리웠다.
그때만 생각하면 그 녀석들이 보고 싶어 가슴이 찡 해진다.
어느 만치 오다가 녀석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내게서 나올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멈춘 자리에 서서 걸어가는 나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한다. 녀석과 나의 경계선이 거기까지였나 보다.
편의점 안에는 다행히 고양이 참치캔이 있었다. 하나만 들고 계산대로 나오다가 하나 더 집어 들었다.
"그 자리에 있겠지?" 다시 지나온 산책길로 들어섰다.
여름밤이면 개구리울음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산책길, 나는 이 길을 개구리길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 개구리길에서 노랑이를 좀 전에 처음 만난 것이다. 어디서부터 따라왔는지는 모르겠다.
누가 내다 버린 걸까, 열린 문틈으로 잠시 나왔다가 길을 잃은 걸까. 설마... 내다 버린 건 아닐 거야.
네오 생각이 났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겠지? 불쌍한 녀석, 살짝 열린 문틈으로 나갔다가 영영 들어오지 못했다. 잠깐의 실수로 어이없게 아이를 잃어버렸다.
그때 난 몇 날 며칠을 고양이 이름을 부르며 온 동네를 쏘다녔다. 밤새 잠도 못 자고 울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좀 전에 만난 노랑이가 더 걱정이 되었다. 아마 이 녀석도 집사의 마음이 시꺼멓게 타는 줄도 모르고 나온 거야. 집을 찾아가야 할 텐데... 생각하며 걷다 보니 노랑이가 보였다. 녀석은 나와 헤어진 그 지점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먹을 것을 찾는 것처럼 보여 안쓰러웠다.
'냐옹~ ' 하고 부르자 얼른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반가운지 달려온다.
길 가장자리 풀숲에 참치캔을 따서 놓아주었다. 정신없이 먹기 시작한다.
"역시 배가 고팠던 거구나?" 다시 보아도 길냥이는 아닌 듯했다.
남은 캔 하나는 주머니에 넣었다. 혹시 내일도 이곳에 있다면 이 아이의 운명도 길냥이의 삶으로 변할 것이다.
"자, 그럼 잘 먹고 내일 또 보자~ 안녕"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날 밤 노랑이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려 쉬이 잠들지 못했다.
다음날 저녁 산책을 조금 서둘렀다. 설렘 반 걱정반으로 노랑이와 헤어졌던 자리까지 뛰었다.
하지만 노랑이는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냐옹~ 하고 불러도 보았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집을 찾아갔나? 주인을 만났으면 다행이고..." 나는 서운한 듯 중얼거렸다.
혹 다른 곳을 헤매거나 쓰레기봉투를 뜯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 마음도, 주머니의 참치캔도 묵직했다.
그 밤도 여전히 나는 그 녀석 생각으로 골똘했다. 집 나온 고양이는 길에서 얼마 못 산다는데...
어디선가 헤매고 있는 거라면 어떡하지?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려온다.
"엄마! 다시 만나면 집으로 데리고 올까요?" 무심코 나온 말이었다.
"또 길 고양이를 데려 온다고? " 엄마는 눈이 동그래져서 쳐다보더니 나지막하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이젠, 그만하자."
그 순간 나도 나를 꾸짖었다. 고양이들로 인해 자유롭지 못했던 세월이 십 년이 넘는다.
그 애들이 이런저런 일로 하나씩 떠나고 난 후 슬픔은 또 얼마나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던가.
그런 상황이 더 생긴다면 그것도 이젠 견디기 힘들 것 같다. 그런데 다시 고양이에게 정신이 팔리다니...
그만큼 했으면 됐어. 그저 노랑이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여전히 녀석을 만났던 개구리길로 산책을 간다. 녀석의 모습은 오늘도 보이지 않았다.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왜 마음은 자꾸 그 녀석의 눈동자에 끌려가고 있는 걸까.
걸을 때마다 가방 안에 고양이 밥, 작은 봉지가 부스럭거린다. 길에서 지내는 길냥이를 만나면
한 줌씩 건네주곤 한다. 그날 만났던 노랑이는 보이지 않지만, 그 후로 사료 한 줌씩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 녀석과 눈을 마주친 순간 빨려 들었던 건 나야. 아무래도 그 녀석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
녀석에겐 내 성의가 그저 한 끼 식사였을 뿐인데... 나만 녀석을 기억하고 걱정하고 있는 거야, 바보처럼.'
인간과 고양이의 교감, 그 미묘한 경계에서 난 늘 우울했었다. 그들의 거리 두기를 내가 잘 몰랐기 때문이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순간들이 허탈했고 서로 마음이 통해 오순도순하다가도 내키지 않으면 쌩 하고
돌아서는 고양이에게 서운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품 안에 들어와 가르릉 거리는 녀석, 그렇게 고양이하고의 복잡한 감정들은 내 일상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곤 했다. 녀석들을 통해서 집착을 내려놓는 법을 배워 왔는데... 의미 없어 보이는 잠깐의 만남에도 마음이 쓰이는 건 뭐지?
가방에서 꺼낸 사료봉지를 만지작 거리자 건너편 소나무 아래서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온다.
작은 호랑이처럼 늠름한 걸음으로, 그러나 사뿐사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