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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팸 구호 Sep 06. 2022

내가 말이 많았구나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순간

첫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말이 굉장히 많습니다. 기억 못 하실 거 같아서 어느 정돈지 한 번 더 말씀드리자면 술 한 모금 안 마시고 떠들면서 밤을 샐 수 있고, 처음 만난 사람과도 3-4시간은 거뜬히 대화(대화라기엔 거의 혼자 떠들겠지마는)할 수 있으며, 거의 하루 종일 진행됐던 소개팅 후에도 너무 혼자만 떠든 탓에 상대방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전혀 기억이 안나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가 말이 많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10년도 안 됐습니다. 


정확히 기억납니다. 대학교에 편입하고 한 학기를 끝낸 후, 여름방학에 친누나와 유럽여행을 갔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여름날의 유럽은 성수기라 어딜 가든 사람이 많습니다. 처음 갔던 여행이니까 당연히 유명한 곳만 고라서 갔겠지요. 그래서 항상 웨이팅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스페인 그라나다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이라는 곳을 갔을 때였습니다. 궁전 안에 들어가려면 역시나 줄을 서야 했습니다. 줄이 정말 길었습니다. 심지어 온도도 무려 44도였습니다. 거짓말 아니고 진짜 44도였습니다. 그라나다 메인 광장에 큰 전광판이 있었는데, 거기에 온도가 자동차만 한 크기로 나와 있어서 기억합니다.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누나랑 줄을 서기 시작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누나와 이런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때는 현지 유심을 안 사서 지금 우리나라 지하철에서 볼 수 있듯 휴대폰에 머리를 박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떠드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지요. 누나는 더운 날씨에 많이 지쳤는지 거의 듣기만 했습니다. 줄이 빠지는 속도가 거의 명절날 고속도로를 방불케 했습니다. 누나는 중간중간 시계를 보며 시간 체크를 했습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떠들고 있었는데, 누나가 갑자기 "니 진짜 말 좀 그만해라. 지금 50분째 떠들고 있는 거 아나?"라고 했습니다. 질린 말투로 "진짜 말 많다"고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아, 내가 말이 많구나?


생각해보면 처음 만난 사람과도 3-4시간을 거뜬히 떠들 수 있다는 것도, 침묵의 순간을 견디지 못해서 그랬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다가도 그 속에서 다른 생각이 떠오르면 빠르게 화제 전환도 했습니다. 어릴 때 학교에서 마인드맵이라는 걸 그렇게 시켰었는데, 그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남 탓 맞습니다.


제가 말할 때 자주 쓰는 단어가 '근데'입니다. 일종의 화제 전환의 시작점이랄까요.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지금처럼 말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그라나다 얘기를 시작했는데, 정말 더웠다는 얘기를 하면서 '근데 유럽 내륙 쪽은 진짜 하나도 안 습하고 뜨겁기만 하더라. 그라나다 말고도...'라며 유럽 내륙의 날씨에 대한 이야기로 빠지는 겁니다. 요즘도 무슨 얘기를 시작하면 그래서 처음 시작했던 이야기 주제가 뭐였는지 까먹고 그럽니다.


제가 말이 많다는 걸 자각하면서부터 상대방과 얘기를 하던 중에 갑자기 '아, 나 말 또 많이 하네'라고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알면서도 이게 잘 멈춰지질 않습니다. 듣는 사람도 고역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지마는 눈앞에 치킨 가져다 놓고 먹지 말라고 할 때처럼 견디기가 힘듭니다. 다행히 제가 말하는 게 쌉노잼은 아닌지 소개팅에서 단 한 번도 첫 만남에서 끝난 적은 없습니다. 많이 웃기도 하고요. 물론 착각일 수 있겠습니다.


스스로 말이 많다는 것과 못 참는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그래도 지루하게는 안 만드려고 최대한 웃음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막 떠들다 보면 중간중간 생각나는 치명적인 드립으로 재미를 주기도 하고요. 재미까지 없으면 저라는 사람 자체가 별로가 될 테니 지나칠 정도로 웃음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떠드는 걸 워낙 좋아하다 보니 유튜브를 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제가 영상 편집을 정말 귀찮아할 걸 매우 잘 알기 때문에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재미없어서 망할 가능성이 훨씬 높지만 편집이 귀찮은 이유가 제일 큽니다. 진짭니다. 귀찮아서 안 하는 거예요. 누가 해주면 할 듯ㅋ


아무튼 말을 많이 한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은 이랬습니다. 앞으로도 말을 참다간 정신병에 걸려 사경을 헤맬 게 틀림없기 때문에 쭉 말을 많이 하면서 살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떠들었다간 정신병이 없어도 정신병에 걸린 사람처럼 보일 테기 때문에 브런치에다 뱉을 생각입니다. 이것도 귀찮아서 접을지도 모르지만 브런치에 꾸준히 글을 쓰겠다는 건 나름의 다짐이기 때문에 당분간은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세상 곳곳에 분포한 저같이 말 많은 분들은 연락 주세요. 어떤 이야기로든 밤새워 떠들 수 있습니다. 아, 이과 쪽 얘기를 하실 거면 죄송합니다. 모르는 얘기는 못 해요. 뭘 알아야 떠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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