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즈, 볼리비아
여전히 볼리비아의 공기는 묘하게 낯설고, 숨이 가빴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침대위에 툭 던졌다. 긴 하루였다. 수업 내내 이어진 현지어 발음 교정 때문에 목이 칼칼했고,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쁘고 심장이 빨리 뛰는 탓에 여전히 힘든 하루였다. 머리가 조금 지끈거려서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던 그때, 내 방 바로 앞에 있는 욕실 쪽에서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무심코 그 소리를 들으며 문득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집에는 나와 함께 온 한국인 여자 둘, 그리고 나 밖에 없는데. 그리고 우리는 방금 막 집에 도착한 참이었다. 아, 욕실을 쓰고 있는 건 분명 새로 온 사람일 것이다.
"아흐..."
그러거나 말거나, 이번엔 짐짝처럼 내 몸을 침대위로 던져버렸다. 많은 궁금증이 순간적으로 올라왔지만 온 몸이 이미 피곤함으로 절어있었기에 그에 대한 궁금증도 피어오르다 금방 사라졌다.이곳에서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긴 했지만, 그래도 낯선 사람을 마주하는 순간은 여전히 어색했다. 오늘 저녁엔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하지? 언제나처럼 비슷한 내용이겠지. 어디서 왔니, 한국사람이야. 왜 이곳에 왔니. 어디를 여행하고싶니, 등등...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다시 몸을 일으켜 컵을 챙겼다. 그리고 물을 마시러 방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문 앞의 욕실이 열렸다.
타일 바닥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발을 멈췄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방울진 물이 뚝뚝 떨어졌다. 흰 티셔츠는 살짝 젖어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다. 짙은 눈썹, 또렷한 눈매, 선명한 이목구비. 한순간, 내 시선이 그의 갈색 눈동자와 맞닿았다. 그도 나를 발견하고는 잠시 멈춰 섰다.
"아."
순간의 정적.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컵을 더욱 꼭 잡았고, 그는 수건을 머리에 올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
조금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스페인어였지만 어딘가 억양이 조금 익숙했다.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안녕. 오늘 들어온거야?"
그가 수건으로 머리칼을 한번 털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 왔어."
나는 그제야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가 웃자, 동시에 움푹 들어가는 보조개와 오른쪽 덧니가 보였다.
"준. 일본에서 왔어."
나는 순간 망설였지만 그러다 컵을 한 손에 쥔 채로 남은 손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나는 한서야. 한국에서 왔어."
우리의 첫 만남은, 그렇게 욕실 앞이라는 다소 어색한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손을 떼며 덧붙였다.
"아, 저녁에 환영 만찬이 있을거야."
준이 나를 바라보았다.
"만찬?"
"응. 새로 온 사람들이 오면 항상 하더라고. 다 같이 식사하면서 인사하는 거."
내 말에 준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구나. 알겠어."
나는 짧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좀 쉬어. 저녁에 봐."
"응, 그럼 이따 봐."
그는 조용한 미소를 남긴 채,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이 다이닝룸 너머로 천천히 사라졌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아참,"
나는 컵을 꼭 쥐고 있었다. 물을 마시러 가던 중이었지. 나는 짧게 숨을 내쉬고,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어갔다. 다이닝룸에는 나무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투명한 유리 물병이 반쯤 채워져 있었다. 나는 조용히 물병을 들어 컵에 물을 따랐다. 그리고 천천히, 한 모금 삼켰다. 심장이 빨리 뛰고 있었다, 물을 마시는 순간에도, 목을 타고 차가운 액체가 흘러들어가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가슴께를 눌렀다. 나는 컵을 다시 입술에 가져갔다. 차가운 물이 입술을 적시는 동안, 심장의 박동은 여전히 귓가에 또렷했다.
다이닝룸의 조명은 부드러운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벽에 걸린 작은 전구들이 은은하게 반짝였고, 스피커에서는 감미로운 기타 선율이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긴 나무 테이블 위에는 닭고기로 만든 현지 요리와 감자 요리, 옥수수 빵이 놓여 있었다. 막 오븐에서 나온 듯, 그릇 주변에 희미한 김이 맴돌았다. 스파이스가 섞인 따뜻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버터에 구운 감자의 고소한 냄새가 공기 속을 부드럽게 감쌌다. 나는 익숙한 자리로 가 앉았다. 이제는 익숙한 공간, 익숙한 냄새. 하지만 그날은 낯선 두 사람이 함께했다. 준과 그의 일본인 동료인 료타가 다이닝룸에 들어서며 공기 속에 살짝 어색한 기류가 스며들었다. 그들은 아직 낯선 듯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그러다 마마의 손짓에 이끌려서야 천천히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내 맞은편에는 준이, 그의 옆에는 함께 온 일본인 동료가, 그리고 내 옆에는 같이 온 한국인 여자 동료 두 명이 자리했다. 우리는 다섯 명이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았고, 곧 식사가 시작되었다.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한 동안은 음악소리와 젓가락과 포크가 그릇에 닿는 작은 소리만이 만이 다이닝룸을 가만히 감쌌다. 다들 배가 고팠던 걸까. 말없이 묵묵히 음식을 집어 들었다. 나는 감자 요리를 천천히 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삭하게 구운 겉부분이 바스락 부서지며, 속은 부드럽게 으깨졌다. 나는 천천히 음식을 씹으며,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 온 동료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짧은 스페인어로 나와 내 동료들에게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했다. 반면 준은 조용했다. 간혹 내 동료가 그에게 질문을 하면 그제야 빙글 웃으며 짧게 대답을 하는 정도였다. 그렇지 않으면 컵에 있는 물만 조금씩 마시면서 테이블 위를 바라보는 정도였다. 마치 접시 위에 놓여있는 음식들을 한 동안 관찰하듯이. 그는 유리컵을 가만히 쥐었다가, 다시 놓았기를 반복했다. 낯선 환경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피곤한 걸까. 한참 료타와 나의 동료들이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던 그때, 조용하던 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오래 있었니?"
나는 료타와 내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음식을 먹던 중 앞에서 조용히 들리던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 우리는 한 달 정도 됐어."
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내 말을 곱씹는 듯했다. 그의 눈썹이 희미하게 움직였고, 손가락이 다시 컵을 가만히 눌렀다.
"처음 왔을 때 어땠어?"
질문이 끝난 순간, 그는 무심한 듯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 와중에도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시선을 피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컵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 물결처럼 잔잔하면서도, 어딘가 깊고 또렷했다. 그는 천천히 물을 삼키면서도, 내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어딘가 모르게 묘한 긴장감이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마치 일부러 천천히 움직이기라도 한 듯이 그는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의 손끝이 컵을 쥔 채 살짝 흔들리는 걸 보니 그도 완전히 편안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잔잔하게 웃으며 답했다.
"힘들었지. 다들 처음엔 힘들어."
처음 도착했을 때 나 보다도 더 힘들어하던 동료들은 료타와 정신없이 여행얘기를 하던 중이었고, 그녀들은 나와 준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흘끗 바라보곤 다시 준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눈을 살짝 깜빡이며 내 말을 들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입술을 오므렸다가 다시 펼쳤다. 마치 추가 질문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듯한 움직임. 그러다 결국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나 걸려?"
"뭐가?"
"이 곳에 익숙해지는 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포크를 내려놓고 어깨를 한번 으쓱이며 답했다.
"한 달쯤?"
하지만 그건 스스로도 확신이 없는 대답이었다. 익숙해진 걸까? 아직도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라도 가슴이 답답했다. 아침마다 머리가 살짝 무거웠고, 어쩌면 일하는 마지막날까지 이곳의 공기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한 달쯤?" 이라고 말하고 웃었다. 그건 아마도, 준이 조금이라도 안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준이 컵을 쥔 손을 멈칫하더니,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달… 一ヶ月かぁ…(한달이라...)"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부드러운 일본어 발음이 공간을 맴돌았다. 일본어였다. 스페인어를 하는 그의 목소리보다 일본어를 하는 그의 목소리가 더 낮아 조금 놀라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한달이라, 라고 말했다. 아마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이겠지. 그가 나를 의식하지 않고, 혼잣말처럼 흘려보낸.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나의 지난 한 달간의 생활을 떠올렸다. 볼리비아에 도착한 당일, 공항에 도착해 숨이 가빴던 순간,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어지러웠던 순간들, 어설픈 스페인어로 겨우 시장에서 장을 보던 날, 생전 처음 겪어보는 고산병에 두통이 사라지지 않던 밤들. 그 시간이 짧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곳에서 한 달을 버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 오늘 막 도착한 그가, 앞으로 한 달 동안 마주할 낯선 공기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음식들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앞으로 겪을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해 줄지 말지 순간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다시 나와 눈을 맞추며 가볍게 웃었다.
"그럼, 한 달 뒤에 같이 여행 가자!"
그의 물잔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미소짓자 양 볼에 찍힌 보조개가 더 움푹 파였다. 그의 눈빛인 설렘과 긴장이 스며 있었다. 부드러운 음악이 여전히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잔잔한 기타 선율이 은은하게 퍼지며, 테이블 위에 흐르는 공기를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었다. 나는 포크를 쥔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
"여행?"
그는 물잔을 가만히 굴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응. 한 달 뒤면, 나도 좀 익숙해질 테니까."
그 말은, 이곳에서 머물던 수많은 사람들이 가볍게 던지던 인사 같은 말일 수도 있었다.
‘나중에 같이 가자.’
‘한 달 뒤에 보자.’
‘언젠가 또 만나자.’
이곳에서는 그런 말들이 자주 오갔다. 서로를 위로하고, 가벼운 기대를 걸면서. 그래서 나는 알았다, 그 말이 단순한 제안일 수도 있다는 걸.
"응."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준은 내 대답에 환하게 웃고는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시선을 살짝 내려 컵에 반쯤 든 물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물컵을 굴리던 그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그의 갈색 눈동자는 다시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보조개가 순간적으로 더욱 깊어졌다가 얕아졌다. 공기 속에 스며든 노란색 불빛은 그날 따라 더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