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즈, 볼리비아
어젯밤, 같이 온 동료들은 각자의 근무지로 떠났다. 이제 일주일 동안 이 집엔 나 혼자. 아, 준과 그의 동료 료타,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만 남게 되었다. 이른 아침의 고요를 깨지 않으려,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섰다. 현관을 지나 대문으로 향하는 길, 발 아래로 닿는 차가운 돌의 감촉이 발끝을 타고 전해졌다. 멀리서 새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고, 햇살은 나뭇잎을 타고 부드럽게 흘렀고 밤새 식은 공기가 피부에 머물렀다.
그때였다.
“유키!”
익숙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칫했다. 고개를 돌리니, 준이 마당에서 맞은편 집에서 나오는 유키를 향해 두 손을 흔들고 있었다. 햇살 속 그의 옆모습, 깊게 패인 보조개, 눈가에 자연스럽게 잡힌 주름.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안녕!”
유키도 밝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반갑게 만난 듯한 표정.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가까운 사이처럼. 유키도 미소 지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들 사이에는 짧은 아침 인사가 오갔다. 웃음소리는 가벼웠고, 공기처럼 자연스러웠다.
유키는 그와 함께 볼리비아에 온 일본인 동료 중 하나였다. 일본에서는 미용 관련 일을 했고, 그가 일하러 갈 지역 근처에서 근무할 예정이었다. 현지어 학원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지만, 깊이 이야기해 본 적은 없다. 다만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할 때의 밝은 표정과 다정한 말투는 기억난다. 온화하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나는 조용히 그의 옆을 지나 대문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 순간, 묘하게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가는 길. 햇살이 이마를 스쳤지만, 가슴 안쪽은 왠지 서늘했다. 나는 묘하게 어지러운 기분으로 걸었다. 발걸음이 가벼운지 무거운지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근무지에서 여기저기 불려다니느라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다. 1,000m 아래에 위치해 있는 학교였지만 여전히 2,500m 고산지대의 얇은 공기 탓에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돌아다녔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해 텅 빈 마당을 지날 땐 아침에 일었던 묘한 감정이 다시 가슴 한편에서 꿈틀 올라왔지만 꾹 눌러닫고 현관문으로 들어섰다. 공기가 더 고요하고 서늘하게 느껴졌다. 평소와 똑같은 공간이었다, 익숙한 가구, 제자리에 놓인 의자, 창가로 들어오는 저녁 노을의 부드러운 빛까지도. 그런데 이곳이 이상하리만치 낯설게 느껴졌다. 손을 흔들던 모습. 햇살을 닮은 미소. 부드럽게 번져가던 그의 웃음소리. 갑자기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나는 머리를 두어번 흔들고 떠오르는 생각을 흩어버렸다. 버스 정류장에서 오래 걸어 올라와서 그런지 목은 바싹 말라있었다. 평소와 다름 없이 내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고 호흡을 고른 후, 침대 맡에 놓여있는 머그컵을 들고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그 곳에 준이 앉아 있었다.
그는 창가 옆 자리에 조용히 앉아 펜을 손에 쥔 채, 노트 위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저녁 노을빛이 사선으로 떨어져 그의 옆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천천히 글자를 써 내려갔다. 눈썹이 살짝 모아졌고, 그의 시선은 노트 위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 모습이 낯설었다. 그동안 그와 여러 번 마주쳤지만, 이렇게까지 깊이 집중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
타닥,
내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딜 때 나무 바닥이 삐걱이며 소리를 냈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노트를 덮었다. 나는 컵을 손에 든 채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
그는 머쓱한 듯 한 손으로 노트 위를 가볍게 눌렀다.
"안녕."
"뭐 하고 있어?"
"그냥, 뭐… 일기 쓰고 있었어."
그의 말투는 평소와 같았지만, 그의 손끝은 여전히 노트 위에 남아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무엇을 쓰고 있었는지는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제야 나는 다른 것이 떠올랐다.
"학원은 왜 안 갔어?"
그는 물잔을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몸이 좀 안 좋아서. 오늘은 오전에만 갔다가 일찍 들어왔어."
"괜찮아?"
"응. 지금은 좀 나아졌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노트를 살짝 밀어뒀지만 여전히 손끝은 노트 위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 어땠어?"
"아, 정신없었는데, 다들 너무 좋은 분들이야."
나는 간단히 대답하며 물을 따랐다. 그 사이, 그의 손이 노트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나는 그제야 자리로 가 앉았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그는 테이블 위에 시선을 두고 있었고 나는 컵을 두 손으로 쥐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때, 그가 컵을 굴리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
"유키네 홈스테이 집에 갈래?"
나는 그 말을 듣고 살짝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는 컵을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저녁에 작은 파티를 한대."
나는 다시, 그가 유키에게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망설였지만 그에게 다시 질문했다.
"나도 가도 되는 거야?"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너도 같이 가도 되냐고 미리 물어봤어."
나는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왜...?"
그는 잠시 고민하듯 입술을 다물더니, 곧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혼자 있는거 싫더라. 너도 그럴 것 같아서."
"아,"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언제..?"
그가 살짝 미소 지으며 답했다.
"오늘. 조금 있다가 가자. 7시 조금 넘어서 오라고 했거든. 아직 준비 중일거야."
"아, 응, 알겠어."
"7시에 여기서 다시 보자."
"응, 있다가 보자."
"있다가 보자."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닫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방은 고요했지만, 마음은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그가 내게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나는 혼자 있는거 싫더라, 너도 그럴 것 같아서.'
나는 손끝으로 침대 시트를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그냥 같은 홈스테이에 머무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동료들에게 나를 소개해주고 싶을 수 있다.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아무리 머릿속으로 그렇게 정리하려 해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묘한 떨림이 가라앉지 않았다. 한참을 그대로 있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울 속 얼굴은 평소보다 조금 더 상기돼 있었다. 한 번 길게 숨을 들이쉬었지만, 가슴 어딘가에 남은 간질거림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다녀오자. 괜히 의미 부여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그렇게 다짐하면서 7시, 방을 나섰다. 다이닝룸으로 돌아오니, 준이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캐주얼한 셔츠 소매를 살짝 걷어 올린 채 손목을 한 번 흔들어 풀고 있었다. 나를 보자 보조개가 깊어졌다.
"갈까?"
나는 짧게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집을 나서자, 저녁 공기가 부드럽게 피부를 감쌌다. 하늘은 짙푸른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구름 사이로 노을의 잔상이 옅게 남아 있었다. 그 아래로 마을의 집들은 따뜻한 조명 속에서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길을 걸었다.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걸음 하나하나가 어쩐지 더 천천히 느껴졌다. 공기가 고요했다. 조금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멈췄다.
'괜히 뭘 더 묻지 말자. 그냥 조용히 걸어가면 돼.'
그런데, 그 순간, 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가 같이 가 줘서 다행이야."
나는 걸음을 멈칫했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어딘가 따뜻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잠시 말을 고르는 듯했다. 그러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덧붙였다.
"너랑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았어."
그 말이 마음 한 쪽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짧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랑?"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응."
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 말이 어쩐지 귓가에 오래 남았다.
유키의 집 앞에 도착하자, 현관문 옆 작은 조명이 노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괜히 한 번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준은 자연스럽게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잠시 후, 안에서 부드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이 열리며 유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우리를 보자 환하게 웃었다.
"왔구나!"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
그녀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네가 와서 정말 기뻐!"
그러면서 옆에 서 있는 준을 한번 흘깃 보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준이 네 이야기를 많이 했었어!"
나는 순간적으로 옆에 있는 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별다른 말 없이 그저 가볍게 웃었다.
"어서 들어와."
유키가 문을 활짝 열었다. 나는 현관을 지나며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집 안은 따뜻한 조명으로 가득했고, 어딘가 부드러운 음악 소리가 배경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어쩐지 그 공간 안에 그와 ‘함께 들어선다’는 사실이 조용히 마음을 흔들었다. 조금 낯설지만, 어쩌면 오래 기억될지도 모를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