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카치(2017년 11월)

라파즈, 볼리비아

by 한서



예정보다 일찍 끝났다.


원래라면 오후 내내 회의가 있었을 테지만, 일정이 갑작스럽게 변경되면서 오후가 통째로 비어버렸다. 순간적으로 생긴 여유에 잠깐 당황했다. 사무실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이 평소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섰다. 바람이 살랑이며 뺨을 스쳤다. 어쩐지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어디로 가야겠다는 생각 없이 발길이 향한 곳은 센트럴 근처였다.

성당 앞 광장은 여전히 활기찼다. 오래된 건물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마리아치를 흉내 낸 듯한 밴드가 작게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음악은 마치 누군가 한 사람만을 위해 연주하는 듯 조심스럽고도 정성스러웠다. 나는 잠시 그 광경에 시선을 두며 광장 가장자리에 있는 벤치에 조심스레 앉았다. 따뜻한 햇살이 등 뒤로 스며들었고, 공기에는 어딘가 달큰한 빵 냄새와 커피 향이 섞여 있었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현지인보다 여행객이 많았다. 큰 배낭을 멘 채 카메라를 꺼내드는 사람들, 길게 땋은 머리를 말아올린 채 그림을 그리고 있는 누군가,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 잡화를 파는 상인들, 큰 떠돌이 개들, 그리고 각자의 시간을 견디는 이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햇살, 음악, 사람들의 소음이 한데 섞여, 마치 낯선 도시의 한가운데서도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는 작은 섬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눈을 다시 떴을 땐 그런 풍경 사이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회색 백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한쪽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천천히 성당 앞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사람.

“준? 준!”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조금 떨렸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내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기고는, 순간 놀란 듯 멈춰 섰다.

“한서…! 벌써 퇴근했어?”
“응, 오늘은 좀 빨리 끝났어. 너는?”
“수업 마치고 좀 둘러보고 있었어. 오늘 날씨 좋잖아.”

나는 자리에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둘은 자연스럽게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성당 앞에서 출발해 광장을 지나고, 어깨를 맞댈 듯 가까운 인도를 따라 걸었다. 주변 배경이 나와 그의 옆으로 천천히 지나갔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 자주 와?”
“가끔. 그냥 걷기에 좋아. 구경할 것도 많잖아.”

앞만 바라보던 그는 말을 잠깐 멈추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다시 웃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괜히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눈을 마주친다는 게 이렇게 낯설고, 또 설레는 일이었나 싶었다. 준과 함께 있을 때면, 어쩐지 긴장과 편안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오랜 친구 같기도 하고, 아주 낯선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가끔씩, 그는 내가 말하지 않은 생각까지도 읽는 것처럼 적절한 순간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게 미소를 지었다.


센트럴을 걸으며 나눈 대화는 어느 때보다 길었다. 짧은 스페인어로 이렇게나 오래 말을 할 수있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그와의 대화는 이상하게 끊기지 않았다. 성당 근처를 돌다가, 결국 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들 때 까지 무리요 광장과 하엔 거리까지 걸어가게 되었다. 하엔거리의 좁은 돌길 위로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떨어졌고, 예전부터 있었던 듯한 조각상과 벽화가 어스름 속에서 또렷하게 드러났다. 나는 그와 나란히 걷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자연스러웠다. 그의 걸음이 내 속도에 맞춰지고 있다는 것, 그도 내가 하는 말을 조용히 잘 듣고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그렇게 그와의 산책이 끝났고 천천히 걸어서 집까지 동네로 접어들 무렵, 말이 조금씩 줄었다. 골목은 조용했다. 문이 절반쯤 열린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스페인어 라디오 소리, 개 짖는 소리, 그리고 우리의 발소리만이 이어졌다. 나는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조용히 걷기로 했다. 그도 그랬는지, 옆에서 말없이 걸었다. 좁은 인도를 걸어갈 때, 그의 손등이 내 손을 자꾸만 스쳤다. 그러다 바람결에 스치듯, 이내 천천히 그의 손이 내 손가락 끝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제스처는 아니었다. 마치, 오래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처럼 움직임이 조심스러웠다. 그의 손은 따뜻했고, 손끝이 떨리듯 가볍게 내 손을 감싸쥐었다.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지만 나는 옆에서 걷고 있는 그를 올려다볼 자신이 없었다. 그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걸었다. 낮게 깔린 구름 아래, 라파스의 저녁 공기는 조금 서늘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이상할 만큼 따뜻했다.


현관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오자 익숙한 집 냄새가 살짝 느껴졌다. 늘 그렇듯 조용한 저녁 공기. 나는 조심스럽게 내 방 문을 열었다. 뒤에서 그의 발소리도 들렸지만, 말은 없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조용했던 집 안, 그는 나를 방 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잘 자라는 말을 하곤 본인의 방으로 돌아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무척 작았다. 나는 방에 들어왔을 때 불을 켜지 않고, 가방을 의자에 걸고 그대로 침대에 툭 걸터앉았다. 창밖에서는 거리의 불빛이 조금씩 들어와 방 안을 흐릿하게 비추었다.
집에 들어서기 전까지 그는 분명,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의 손이 내 손을 감싸던 순간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방 문 앞까지 손을 떼지 않았다.
'뭐지?'
나는 아직도 손바닥 어딘가에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에게 어떤 말이라도 하고 싶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을 켰다. 하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손끝만 몇 번 스크린을 쓰다듬다 말았다.

‘준, 오늘 즐거웠어. 잘 자.’
짧은 메시지를 적었다가,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혹시 너무 들뜬 티가 날까, 아니면 괜히 어색해질까. 결국 메시지를 지우고, 테이블 위에 있는 작은 독서 조명을 켜고 일기장을 꺼냈다. 펜을 잡고, 오늘 있었던 일을 몇 줄 써 내려갔다. 생각보다 단어들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우연히 마주쳤다’, ‘함께 오래 걸었다’, ‘손을 잡았다’...

나는 갑자기 확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천천히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라파스의 밤은 여전히 조용했다. 멀리서 자동차 경적이 한 번 울리고,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문득, 그의 방은 불이 켜져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도 지금 나처럼 잠들지 못하고 있을까. 혹은, 아무렇지 않게 누워버렸을까...? 내일 그를 어떻게 봐야하는 거지...? 이런 저런 걱정과 설렘에 오늘 밤은 한참을 잠에 들지 못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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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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