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티쿨로 (2017년 11월 25일)

라파즈, 볼리비아

by 한서


그날 이후,

준과 나는 남은 며칠을 더욱 조심스럽게,

그리고 소중하게 보냈다.


아침이면 여느 때처럼 짧은 인사를 나누었지만, 서로의 눈빛에는 말로 다 전하지 못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여전히 누구보다 먼저 집을 나섰고, 준은 변함없이 정원에 나와 “잘 다녀와.”라고 인사했다. 그 한마디와 미소가, 이제는 하루의 시작을 더 간절하게 만들었다. 문을 나서기 전, 나는 괜히 한 번 더 뒤돌아보곤 했다. 준이 손을 흔들어주면, 그 모습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저녁이 되면, 우리는 식당에서 다시 마주쳤다. 하루 종일 각자의 삶에 흩어져 있던 마음이, 식탁 위에 놓인 따끈한 음식과 함께 조금씩 모였다. 료타는 여전히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식탁에 잘 앉지 않았고, 식당에는 나와 준, 그리고 며칠만 머무는 여행객들만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함께 밥을 먹은 이후엔 밤 늦은 시간까지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이어갔다. 스페인어로 대화를 하는 것이 어렵긴 했지만 휴대폰을 켜서 단어를 찾아보기도 하고, 번역기를 켜 문장을 바꾸며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밤 12시가 넘어서도 식당 불이 꺼지지 않자, 홈스테이 마마가 얼른 들어가서 자라고 몇 번이나 재촉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피식 웃으며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점점 특별해지는 걸 느꼈다. 어느 저녁, 우리는 자연스럽게 집 근처 공원에 가기로 했다. 별다른 약속도, 거창한 계획도 없었다. 저녁 식사 후, “야경 보러 갈래?”라는 준의 한마디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 근처 몬티쿨로(Montículo) 공원에 오르자, 라파스의 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계곡을 따라 이어진 오렌지빛 불빛들이 조용히 흐르고, 지붕들은 어둠 속에서 부드럽게 윤곽을 드러냈다. 차가운 밤공기 속, 전망대 난간에는 서로 어깨를 기대거나 손을 맞잡은 연인들이 조용히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속삭임과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희미하게 들려왔다. 준과 나는 난간에 나란히 서서, 말없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도시의 불빛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이고, 오렌지빛 조명이 얼굴을 은은하게 비췄다. 나는 괜히 손끝에 힘을 주었다.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팔을 기대었다.

준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잠시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와의 짧은 눈맞춤만으로 말로는 다 전하지 못하는 감정을 조용히 전했다. 그는 잠시 미소지었다. 우리 사이에는 긴 침묵이 흘렀지만, 그 침묵은 어색함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더 또렷하게 느끼게 해주는 고요함이었다.

그 순간, 준이 떠날 날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불현듯 마음을 파고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보이던 도시의 풍경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불빛들이 멀어지는 기차처럼 아득하게 흩어지고, 내 안에 설레는 감정들이 불안으로 바뀌어 서서히 가라앉았다. 나는 그를 바라보지 않고 앞만 바라본채 입을 열었다.

“준, 이제 며칠 안 남았네, 그치?”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작고, 떨렸다. 의 시선이 다시 느껴졌다.

“응, 일주일도 안 남았네.”

그의 목소리에도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그 순간, 마음이 먹먹해졌다. 함께한 아침 인사, 식탁에 마주 앉던 저녁과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들 그리고 오늘 밤 이 풍경까지― 모든 것이 곧 끝나버릴 것만 같아, 갑자기 두려웠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오렌지색 불빛이 흐릿하게 번지고, 눈앞이 잠시 흐려졌다. 그때 준이 조용히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올게. 매일 연락할게.”

그의 말은 따뜻해졌지만, 우린 다시 볼 수 있을까, 이 밤처럼 이렇게 가까이 있을 수 있을까― 수많은 질문이 마음속에 맴돌았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나 혼자 잘 해낼 수 있을까. 네가 없는 이곳이 상상되지 않아...,’

흐리게 번지던 불빛이 이내 맑게 보였다. 나는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을 조용히 닦고 여전히 그를 바라보지 않은 채 말했다.

“준, 네가 없는 라파스는 많이 다를거야. 그래도 우리 매일 연락하자. 나도 너한테 갈게.”

별빛과 오렌지빛 불빛 아래,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야경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살짝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그 바람결 속에서도, 나는 옆에 있는 그의 체온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떨림처럼, 그의 손이 내 손등 위로 천천히 포개졌다. 그 날 이후 처음이었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오래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꺼내 든 마음 같았다.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온기가 천천히 퍼졌다. 우리는 서로 말하지 않았다. 말이 없어도, 지금 이 순간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너무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아주 천천히 나를 돌려세워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마와 이마가 살짝 스칠 듯 가까워졌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며 눈을 감았다. 바람 소리와 낮게 깔린 도시의 소음이 멀어지고, 가슴속에서 고요한 진동처럼 떨림이 퍼졌다. 그의 입술이 아주 조심스럽게 내 입술 위에 닿았다. 서두르지 않고, 가볍게 머물다 조용히 물러났다. 눈을 뜨자 그의 눈빛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 둘 다 지금 이 순간이 깨지지 않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더 천천히 서로를 확인하고 있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지만 나는 미소를 지었다. 준도 잠시 숨을 고르다 나직이 웃었다.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 우리는 조용히 손을 잡은 채 다시 전망대 아래 도시를 바라보았다. 서로 기대어 선 어깨가 바람에 스쳐가고, 그날 밤의 라파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해 보였다. 모든 불빛이 우리를 위해 켜진 것만 같았다. 그의 온기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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