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한민국
오늘은 회사 근처가 아닌 집 가까운 중랑천으로 향했다. 하늘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산책로를 따라 걷는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은 반쯤 가려진 채, 눈이 마주치면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가끔 바람이 세게 불면 마스크 안쪽에서 내 숨결이 부딪히는 느낌이 뚜렷하게 전해졌다. 벤치에 앉은 노부부도,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도,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도 모두 마스크를 쓴 채였다. 누군가는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며 마스크 끈을 살짝 당겼고, 또 누군가는 두 손으로 마스크를 고쳐 쓰며 강가를 바라보았다.
산책로 곳곳에는 ‘마스크 착용’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서로 일정 거리를 두고 걸었다. 누군가 기침을 하면, 주위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한 발짝 더 물러서는 모습도 익숙해졌다. 밤공기 속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배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물 위에 길게 늘어져, 금빛 띠처럼 반짝였다. 나는 천천히 강가를 따라 걸었다. 발밑에서는 젖은 흙냄새와 풀잎의 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멀리서 자전거 종소리가 들렸고, 저만치 벤치에 앉은 사람들이 서로의 표정보다 눈빛과 몸짓으로 안부를 주고받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멈춰 서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마스크 너머로 스며드는 풀잎 냄새와 젖은 흙내가 오늘따라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천천히 길을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도심의 불빛을 피해 간신히 드러난 별빛이 은은하게 깜박였다. 멀리 보이는 건물 불빛과 강물 위에 번지는 잔잔한 빛이 괜히 더 예쁘게 느껴졌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한서 박 (20:18, 4월 14일)
- 지금 산책하면서 찍었어. 밤공기가 시원해~
잠시 후, 화면이 켜진다.
준 아마노 (20:21, 4월 14일)
- 와, 진짜 예쁘다. 날씨 괜찮아? 오늘 일본은 비가 왔어.
나는 천천히 걷던 발걸음을 멈추고, 가로등 아래에 서서 화면을 올려다봤다. 그의 메시지를 읽으니, 멀리 떨어져 있는 그곳의 공기가 궁금해졌다. 휴대폰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잠시 머뭇거리다 답장을 썼다.
한서 박 (20:23, 4월 14일)
- 서울도 낮엔 바람이 세더니 밤에는 시원해서 걷기 딱 좋아. 비 왔구나… 내일은 맑아졌으면 좋겠다!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나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중랑천 물가에는 작은 오리떼가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가끔씩 바람이 불 때마다 물결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심의 불빛을 피해 간신히 드러난 별들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곧, 그가 사진을 하나 보냈다. 사진을 터치해 크게 보니, 일본의 어느 동네, 젖은 도로 위로 주황빛 가로등이 번져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며, 그곳의 밤공기와 빗물 냄새가 상상됐다.
준 아마노 (20:26, 4월 14일)
- 퇴근할 땐 이렇게 되어 있었어. 근데 빗물에 비친 불빛도 나름 예쁘더라구.
나는 잠시 멈춰 서서, 그의 사진을 한참 바라봤다. 사진 속 주황빛이 낯설면서도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주머니 속 손이 서늘해져, 옷깃을 한 번 더 여몄다. 강가에는 기타를 메고 걷는 청년이 지나가고, 멀리서 러닝크루들이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괜히 그와 함께 걷는 상상을 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와의 우연이, 인연이 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가 한국에, 아니면 내가 일본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그런 상상을 하며 지금까지 그와 연락을 지속했었다. 그리고 그가 나를 만나러 왔으면 좋겠다는, 휴대폰이 아닌 현실에서, 서로의 눈앞에서, 두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거리에 그가 있으면 좋겠다는 그런 욕심이 생겨났다.
한서 박 (20:39, 4월 14일)
- 서울 놀러와! 고기 사줄게! 같이 한강도 가고, 밤에 자전거도 타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라면 포장마차도 데려가 줄게. 진짜, 너 오면 내가 완전 가이드 해줄게. 빨리 와! 2시간 밖에 안 걸려!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나는 강가에 잠시 앉았다. 휴대폰을 한 손에 쥔 채, 중랑천을 바라보며 사진을 하나 더 찍었다. 물 위에 반사된 가로등 불빛이 금빛 조각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만날 수 없는 상황이고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는 서로의 밤을 함께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준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
준 아마노 (20:45, 4월 14일) - 맞아, 2시간 밖에 안 걸리니까, 내일 당장 출발할게! 저녁 같이 먹자! 하하하!
나는 그 메시지를 읽으며 피식 웃었지만 이내 마음이 먹먹해졌다. 우리 둘 다 알면서도,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장난을 주고받았다. 비행기표를 검색해볼 필요도 없다는 걸, 지금은 아무리 마음이 간절해도 국경을 넘을 수 없다는 걸, 서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정말로 2시간이면 만날 수 있는 거리인데, 이렇게 가까운 숫자가 지금은 영영 닿지 못할 거리처럼 느껴진다. 상상 속에서만 그와 저녁을 먹고 메시지로만 서로의 하루를 나누는 밤이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다. 손끝에 남은 휴대폰의 미지근한 온기를 느끼며, 나는 마스크 너머로 차가운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내 숨이 마스크 안에서 희미하게 맺혔다. 언젠가, 정말 언젠가는, 이 길을 그와 나란히 걸을 수 있기를 바라며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