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한민국
예전엔 길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제는 짧은 안부와 일상이 대부분이다. 그의 이름이 화면에 뜰 때마다, 내 마음에는 작은 설렘이 일었다. 휴대폰에는 그가 보내온 간단한 메시지, 도시락 사진, 조카가 만든 모빌 영상, 잠든 강아지 사진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내가 찍어 보낸 서울의 하늘과 길가에 핀 꽃들, 회사 이야기, 점심 사진도 그 사이에 섞여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하루를 이렇게 작은 조각들로 나누며 살아갔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진과 글로는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밀려왔다. 그가 웃을 때의 입꼬리, 대답 전의 머뭇거림, 말끝에 머금는 미소. 그 모든 것이 보고싶어서 내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했다. 그래서 가끔 나는 그런 그리움을 장난스럽게 내비치곤 했다. 오늘도, 똑같았다.
나는 중랑천을 걸으며 그에게 메세지를 보냈고, 언제나처럼 중랑천의 밤 사진을 보냈다.
준 아마노 (18:20, 5월 3일)
- 오늘 오사카는 비가 내려.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어.
한서 박 (18:59, 5월 3일)
- 내가 우산 들고 갈까? 조금만 기다려! 두 시간이면 가니까!
이런 농담이 오갈수록, 마음 한편이 더 무거워졌다. 그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간절해졌다. 이젠 그냥,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그가 웃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렇게 매일을 휴대폰을 손에 쥐고 몇 번이나 망설였다. 대화창을 열었다 닫고, 메시지를 쓰다 지우고,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한서 박 (19:12, 5월 3일)
- 준, 혹시 지금 시간 좀 낼 수 있어?
이 한 줄을, 내 작은 기대와 설렘을, 고스란히 그에게 전했다.
내가 보낸 메세지 옆에 '읽음'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었지만, 꽤 오랫동안 그에게로부터 답이 오지 않았다. 그가 그 시간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잠시, 내 발걸음에 집중해보려 했지만 심장이 쿵쾅거리고 숨이 탁 막혔다. 그리고 손끝에서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준 아마노 (19:20, 5월 3일)
- 응, 그럼. 무슨 일 있어?
오늘의 나는, 그에게 조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길을 걷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숨을 고르고 그에게 메세지를 남겼다.
한서 박 (19:24, 5월 3일)
- 우리, 잠깐 영상통화 할래?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하고 화면만 바라봤다. 혹시 너무 갑작스러운 건 아닐까, 내가 괜한 부탁을 한 건 아닐까,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런데 내가 문자를 보내자마자 곧바로 영상통화 요청이 들어왔다. 진동이 손바닥을 타고 퍼지는 순간,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내가 먼저 제안해놓고도, 이렇게 바로 받아도 되는 건지 잠깐 망설여졌다. 마치 준비가 덜 된 사람처럼, 숨을 고르고 화면을 바라봤다.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순간 화면을 누르는 손이 조심스러워졌다. 그래도 그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망설임을 조금씩 밀어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통화 아이콘을 눌렀다.
"...안녕."
그다. 화면 너머, 3년 전 내 기억 속에 멈춘 그가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
내 목소리가 살짝 떨렸지만, 웃으며 대답했다. 그를 화면으로 마주한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이 스르륵 울렸다.
움직이는 눈빛, 자연스러운 표정,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는 모습. 영상 너머로 마주한 그의 얼굴은, 예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볼살이 조금 빠져 있었고 어딘지 모르게 지쳐 보였다. 환하게 웃을 때 패이던 보조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세월이 그의 얼굴을 조금 달라지게 만들어 놓았다. 조금 더 선명해진 턱선, 살짝 빠진 볼살, 그리고 전보다 차분해진 표정.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의 모습이 묘한 감정을 밀려오게 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순간 울컥하는 마음을 억누르느라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눈물이 올라오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겨우 마주한 얼굴 앞에서 울어버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몇 달간 문자로만 나누던 시간 끝에, 목소리와 서로의 표정이 휴대폰 화면 가득 채워졌다. 그의 뒤로 사진으로만 보던 스탠드와 책들이 보였다. 그 모든 풍경이 낯설고도 익숙하게 내 마음을 흔들었다.
"오랜만이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화면 속 그는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는 반가움과 어색함, 그리고 조금은 쓸쓸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나도 따라 미소를 지었지만, 목에 걸린 울컥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응. 정말 오랜만이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이번엔 어색하지 않았다. 서로의 눈빛이 조용히 이어졌다. 나는 그가 화면 너머에서 나를 바라보는 동안, 그리움이 천천히 가슴을 채우는 걸 느꼈다. 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걸 보며, 나 역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산책중이야?"
그의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운 다정함이 묻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을 조금 돌려 밤하늘과 강가를 보여주었다.
"응, 아직 밖이야."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그 미소는 예전보다 조금 더 부드럽고, 어딘가 지친 듯했다. 잠시 시선을 돌리던 그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눈가에 잔잔한 그리움을 띄웠다.
"중랑천이구나."
"맞아."
나는 화면 너머 그가 내 일상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언제 집에 가려구."
그의 목소리는 살짝 걱정스러웠다. 나는 그가 내 걱정을 해준다는 사실에 괜히 마음이 간질거렸다.
"이제 들어가야지."
짧은 대화가 오가는 동안, 그의 표정은 점점 더 편안해졌다. 화면 너머에서 그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살짝 웃었다.
"...앞으로 종종 이렇게 연락하자."
"좋아."
"조심히 가. 들어가서 메세지 보내줘."
그의 말에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따뜻해지면서도, 왠지 모르게 먹먹해졌다. 통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밤공기가 유난히 선명하게 느껴졌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 나는 천천히 걸었다. 그와 나눈 짧은 대화, 화면 너머 그의 미소, 그리고 그리움이 뒤섞인 감정이 내 안에서 오래도록 잔물결처럼 일렁였다.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먹먹했지만, 오늘 밤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멀리 있어도, 우리는 다시 연결될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이 내 걸음에 힘을 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