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카치 (2017년 12월)

라파즈, 볼리비아

by 한서



나는 여전히 누구보다 먼저 집을 나섰고,

준은 언제나처럼 출근 시간에 맞춰

정원에 나와 있었다.


차가운 아침 공기 속에서 그는 나를 기다렸다가 짧게 “잘 다녀와.”라고 인사했다. 그럴 때면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이면 우리는 굳이 약속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서로를 찾았다. 식당 대신,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동네를 산책하거나, 작은 시장 골목을 함께 걸었다. 준은 종종 내가 모르는 라파스의 숨은 골목길을 안내해주었고 나는 그와 함께 골목 어귀에 앉아 노점에서 파는 뚜꾸마나(감자, 계란, 소고기 등을 향신료에 버무린 후 만두피에 넣어 튀긴 볼리비아 전통음식)과 뜨거운 아피(보라색 옥수수로 만든 뜨겁고 달콤하며 걸쭉한 음료로, 질감이 풍부하고 계피와 정향을 첨가하기도 함.) 한 잔을 나눠 마셨다. 어느 날은, 해가 지고 난 뒤 언덕 위 작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오면, 준이 조용히 내 어깨에 자신의 재킷을 살며시 덮어주었다. 나는 그 따뜻함에 조용히 손을 모으고, 준의 옆모습을 슬쩍 바라보았다.

어느 날엔 라파스의 오래된 서점에 들어가 책을 골랐다. 그 곳에서 준이 일본어로 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1984를 발견했고 나는 그가 일본어로 조용히 읽어주는 소설을 멍하니 들었다. 그의 목소리와 그 순간의 공기가 그의 모국어를 오히려 더 가깝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시장에서 산 작은 과일을 나눠 먹으며 서로의 하루에 대해 조금씩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준은 사마이파타에서의 새로운 여행을 기대하는 마음과, 라파스에서의 이 시간이 끝나간다는 아쉬움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준에게 한국의 가족과 친구들 이야기를, 준은 일본의 바다와 고향의 봄 풍경을 들려주었다. 서로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앞으로의 꿈에 대해 밤이 깊도록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렇게, 매일 저녁이 조금씩 달랐고, 함께 걷는 거리마다, 함께 나누는 음식마다, 이별이 가까워질수록 모든 순간이 더욱 선명하게 마음에 새겨졌다. 나는 그와 함께하는 이 평범한 저녁들이 앞으로 오래도록 기억날 것임을, 그때는 이미 알고 있었다.


토요일 밤, 우리는 소포카치의 디젤(Disel)이라는 작은 펍에 갔다. 라파스의 밤거리는 주말의 활기로 가득했고 펍 안에는 현지인과 여행자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우리는 맥주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Salud.(건배)"

준이 잔을 들며 웃었다. 나는 잔을 들어올리며 답했다.

"Salud."

펍 안에는 기타와 북이 어우러진 음악이 은은하게 흐르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잔잔하게 공간을 채웠다. 한동안 우리는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조용히 잔을 비우며 음악을 들었다.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잔이 비워지고, 펍의 소음도 익숙해졌다.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지도, 손을 잡지도 않았다. 그저 같은 공간, 같은 공기를 나누며 어느 순간 다시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다 결국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에야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라파스의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준은 내 옆에 조용히 섰고, 우리는 천천히 골목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 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언제나처럼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걸었다. 그렇게 서로의 곁에 있다는 사실만을 조용히 확인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토요일 밤이었다.

일요일 아침,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창밖에는 이른 햇살이 희미하게 깔려 있었고, 집 안은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작은 부엌에서 따뜻한 물 한잔을 컵에 담았다. 잠시 뒤, 준이 조용히 부엌으로 들어왔다.

“잘 잤어?”
그가 물었다.

“응, 너는?”

“거의 못 잤어. 계속 뒤척였어.”

우리는 말없이 음료를 마셨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둘 다 고개를 숙였다.

"짐은 잘 챙겼어?"

"응, 방이 깨끗해졌어."

출발 시간이 다가오자, 둘 다 말수가 더 줄었다. 식탁 위엔 잔을 들었다가 내리는 소리와 티스푼이 잔벽에 부딪히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아직 이른 아침, 거리는 고요했고, 햇살이 서서히 골목을 물들이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길, 우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서로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말이 필요 없는 순간, 손끝으로만 전해지는 마음이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 이른 시간임에도 출국장에는 이미 여행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준은 내 옆에 서서, 출국장 쪽을 바라보았다. 가방을 어깨에 멘 그의 모습이 오늘따라 멀게 느껴졌다. 둘 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나는 괜히 그의 셔츠 소매를 한 번 더 매만졌다. 준은 내 손을 잡아 조용히 꼭 쥐었다.

“한서, 꼭 다시 올게.”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차오르는 걸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준이 조심스럽게 나를 안았다. 그의 체온이 온몸에 퍼졌다. 짧은 포옹이었지만, 그 안에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도착하면 연락할게. 내일도, 모레도 매일 매일 연락할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응, 기다릴게. 잘 다녀와.”

준이 천천히 내 손을 놓고, 출국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서 바라봤다. 그리고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 즈음에야 눈물이 터져나와 한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잠시 후, 출국장 스피커에서 비행기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제야 현실을 실감하며, 주머니에서 조그만 쪽지를 꺼내 손에 꼭 쥐었다. 준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말들이 마음속에 맴돌았다.

공항의 유리벽 너머로 아침 햇살이 더 선명하게 번져왔다.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 멀어지는 뒷모습, 그리고 내 손에 남은 따뜻한 온기. 모든 것이 낯설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돌아서 출구 쪽으로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준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휴대폰을 꺼내 마지막으로 그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잘 가, 준.”

아침 햇살이 내 어깨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이제, 나의 하루도 다시 시작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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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