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카치 (2018년 4월)

라파즈, 볼리비아

by 한서



해가 천천히 엘 알토 산등성이 너머로 사그라지고 있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익숙한 골목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뺨을 스치는 선선한 공기도, 길가의 자갈들도 오늘따라 유난히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가 라파스로 돌아온다는 메시지를 받은 뒤로, 나도 모르게 매 순간을 의식하며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 머리를 말릴 때, 거울 앞에 섰을 때, 거리의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을 흘낏 볼 때마다 내가 그에게 어떻게 보일까 상상하곤 했다. 설렘도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밀려든 것은 알 수 없는 긴장감이었다. 막상 그를 마주한다면,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할지 계속 신경쓰였다.


카페에 다다랐을 땐 입구 앞에서 잠깐 숨을 고르고 차가워진 손끝으로 부드럽게 문을 밀었다. 작은 종이 맑게 울렸고 카페 안에서 풍기는 따뜻한 커피향에 긴장하고 있던 나도 조금은 풀어졌다. 마치 무거웠던 어깨가 천천히 풀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두 눈으로 공간을 천천히 훑었다. 오렌지 빛 조명이 내리는 창가 자리에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 사람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흰 셔츠에 네이비 니트와 고개를 약간 돌린 그의 옆얼굴을 보는 순간, 내 발걸음이 멈췄다.

준과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라파스에서 처음 손을 잡았던 밤, 몬티쿨로 언덕에서 나란히 바라보던 야경, 그가 떠나던 날 공항에서 약속했던, 매일 연락하겠다던 그 말들- 그 말이 지난 시간 내내 나를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곁에 가다 멈춰 서있던 나를 준이 발견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서로의 시선이 맞닿았다.

“안녕.”
그가 먼저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 한마디에 마치 심장이 한번에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웃음이었지만 그 입가에는 어디선가 짙어진 그림자 같은 무언가가 어렴풋이 드리워져 있었다. 환히 웃을 때마다 생기던 보조개는 여전했으나 그 아래에 낯선 감정이 감춰진 듯했다.

“안녕.”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하고 그의 맞은편 자리에 걸어가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반쯤 마신 커피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기다리게 했지?”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괜찮아.”
서로 머뭇대며 짧은 침묵이 흐른다. 그는 컵을 손에 쥐고, 어색한 듯 가볍게 미소지었다. 나도 모르게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마음속에서 부딪혔다. 그를 보자마자 밀려든 반가움, 다가서지 못했던 그리움, 그리고 아무렇게나 꾹꾹 눌러뒀던 서운함 —— 모든 것이 한꺼번에 솟구쳤다.

“라파스, 오랜만이지?”
내가 말하자 그가 창밖 어둑해진 골목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깐 말이야.”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도착하자마자 공기부터 다르더라. 어떻게 살았었지?”

“난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적응만 하다가 갈 거 같아.”

그와 나는 조용히 웃었다. 그는 시선이 잠깐 내려갔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눈을 마주치고 있는 나와 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카페의 배경음악만 잠시 흘렀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조심스러운 마음이 엿보였다. 그리고 곧,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하는 것도, 지금은 자신이 없었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사마이파타에 가서는 하루하루가 정말 순식간에 흘렀어. 새로운 곳, 익숙지 않은 사람들, 갑작스럽게 따라오는 무거운 책임들.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너무 피곤하고 무기력해서, 퇴근하면 그냥 잠들어버리기 바빴어.”

그가 말을 이어갈수록, 내 마음 한 구석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그의 이야기에 이해는 갔지만, 내가 지난 시간 얼마나 많이 기다리고 또 스스로를 다독이며 견뎠는지 생각하자 쓰라린 감정이 밀려왔다.

“그래서 정신을 차려보면 이틀, 삼일이 지나있고... 그렇게 너에게 답을 보내지 못했었어. 그런데 그 와중에도 네 생각은 자꾸 나서 막상 연락하려고 하면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흔들리는 커피잔 너머로, 지난 시간이 내려앉았다. 이 대화를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상상해봤다. 혹시 다른 사람이 생긴 건 아닐지, 아니면 내가 너무 부담이 된 건 아닌지—— 하지만 지금 그가 내 앞에서 말하는 목소리는, 다분히 진심이었다. 그래서 더 울컥했다.

“나는…”
입을 뗐지만 목이 잠겼다. 조심스럽게 다시 말했다.

“니가 나 없이도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어.”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정말 아니야.”
익숙한 눈동자, 오래된 눈웃음. 내가 사랑하던 그의 모습은 여전히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내뱉은 말은 작은 원망도, 화도 아니었다. 마음속 오랜 시간 맴돌던 한 문장이 조용히 흘러나왔을 뿐이었다. 그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천천히 말했다.

“무서웠던 것 같아. 네가 내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있을까 봐, 네가 내게서 돌아서 있을까 봐… 그게 두려웠던 것 같아.”

그 말에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북받쳤다. 그러니까, 나도 그랬다고. 나 역시 같은 감정으로 널 미워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고 말하려 했으나, 목이 메어 쉽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테이블 너머로 그의 손등을 잡았다. 그는 놀란 듯했지만, 이내 천천히 손가락을 맞잡았다. 나는 그가 여전히 나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일도 시간 돼?”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응."

"내일은, 그냥 우리 둘만의 하루였으면 좋겠다. 아침 일찍 보자. 아바로아 광장에서 만나.”

창밖에는 라파스의 밤이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 내일 더 많이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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