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한민국
아무런 생각 없이 그 속에서 떠드는 사람들의 입모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째 계속된 야근에 지쳐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예상보다 일이 일찍 끝나 조금은 여유로운 밤을 맞이했다. 소파에 깊이 몸을 묻고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다 문득 그가 떠올랐다. 그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틀 전부터 그의 메시지가 뚝 끊겼다. 얼마 전만 해도 벚꽃이 한창이라며 서로 사진을 주고받으며 웃었는데, 어느새 벚꽃은 지고 나뭇가지마다 연두색 작은 잎들이 하나둘 돋아나기 시작했다. 계절은 쉼 없이 흘러가고 있는데, 그의 소식은 멈춰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괜스레 걱정이 스쳤다. 하지만 곧, 그런 생각이 쓸데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는 늘 바빴으니까. 그저 잠시 여유가 없었을 뿐일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어쩐지 허전했다.
그때, 소파 옆에 아무렇게나 벗어둔 마스크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조용히 진동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과 함께 화면을 바라봤다. 혹시 그일까? 아니면 또 다른 광고 문자일까? 희미한 기대와 약간의 두려움이 뒤섞인 채, 나는 천천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준 아마노 (21:39, 4월 5일)
- 안녕, 한서야. 답장 늦어서 미안해...,
그였다. 최근 들어 그는 자주 피곤하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돌아오면 소파에 쓰러지듯 잠들고, 새벽녘에야 겨우 잠에서 깬다고 했다. 다시 씻고 침대에 누우면 아침은 이미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의 피로가 메시지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지난 주말, 그는 부모님 댁에 다녀왔다고 했다. 개와 함께 조용한 동네를 산책하며 오랜만에 쉬는 기분이었다고하며 본인이 부모님댁에서 찍은 강아지 '하쿠' 사진을 보냈다.
나는 소파에 기대 그가 보낸 메시지를 읽으며, 문득 엄마 집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강아지들이 북적이던 집안 풍경, 저녁밥 냄새, 소란스러운 웃음소리 같은 것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상하게도, 그의 평범한 일상 이야기가 내 마음 한구석을 살짝 건드렸다. 오늘따라 집 안이 더 조용하게 느껴졌다. 그의 말 한마디가, 잠시 잊고 있던 그리움을 불러냈다. 그러다 나는 조심스레 걱정스러운 메시지를 보냈다.
한서 박 (22:02, 4월 5일)
- 괜찮아? 코로나에 걸린것은 아니었다니 정말 다행이다. 요즘 정말 많이 피곤해 보이네. 너무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나는 그와 더 가까워지고 싶다. 단순히 안부만 묻는 사이가 아니라, 그의 일상에 조금 더 스며들고 싶었다. 하루의 끝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조용히 마음을 두드렸다.
사실 요즘 나는 개인적인 시간과 업무 시간이 점점 뒤섞여가는 기분이었다. 카카오톡 알림은 업무와 사적인 대화가 구분 없이 쏟아졌고, 퇴근 후에도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친구들과의 대화도, 가족과의 연락도, 어느새 모두 같은 창 안에서 섞여버렸다. 나만의 공간이 점점 좁아지는 것 같아 답답할 때가 많았다. 오늘은 최근들어 이런 문제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을 그에게 털어놓자, 본인은 일본에선 주로 LINE을 개인용으로 쓰고, 회사에선 마이크로소프트 팀즈를 쓴다며 한국은 카카오톡을 워낙 많이 사용하니까 구분이 쉽지 않겠다, 많이 피곤하겠다며 답장했다. 그의 다정한 말에,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에게 회신했다.
한서 박 (22:34, 4월 5일)
- 메신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실 한국에서는 라인을 거의 안 쓰는데, 너의 일본인 친구들 리스트 사이에 한국인 친구 한 명쯤은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우리 이제 조금 더 편한 데서 얘기하자.
메시지를 보내는 순간, 내 감정은 미묘하게 달라졌다. 처음엔 농담처럼 가볍게 던졌지만, 막상 전송 버튼을 누르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혹시 그가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그의 얼굴을 어쩌면 볼 수있겠다는 설렘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의 반응을 기다리는 짧은 순간 동안,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솔직하게 내 마음을 전했다는 사실에 긴장했다. 나의 감정은 두려움과 설렘, 그리고 조심스러운 희망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곧 그의 답장이 도착했다.
준 아마노 (23:05, 4월 5일)
- 오! 그래 좋아. 가입하면 알려줘. 내가 메세지 보낼게!
작은 화면에 그의 메세지가 도착하는 순간, 나는 입을 막고 짧게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나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그와의 소통창이 바뀌는 일일뿐이지만 그와의 작은 우주가 새롭게 열린 것만 같았다. 설렘과 두려움이 묘하게 뒤섞인 채, 나는 휴대폰을 꼭 쥐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새로운 공간에서는 조금 더 솔직하고 따뜻한 말들을 주고 받을 수 있을까. 밤은 조용히 깊어가고, 나는 또 다른 하루를, 또 다른 계절을, 그와 함께 맞이할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