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대한민국
야근을 자처하듯 보고서를 더 길게 붙잡고 있었고, 일부러 엑셀 파일을 열어놓고 숫자와 셀 색깔에 집착했다. 퇴근 후엔 휴대폰을 가방 속에 넣어두고 알람이 울릴 때까지 일부러 열어보지 않았다. 집안일을 하고, 산책을하고 바쁘게 보내려했음에도 그렇게 밤이 깊어 침대 위에 누우면 잠을 청하려할 때 즈음, 머리맡에 엎드린 채 그와의 대화창을 다시 열어보는 일이 계속 되었다.
그 주 금요일 오후, 팀장님이 주말 계획을 가볍게 물었을 때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향에 다녀오려고요'라고 내뱉었다. 정말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 주 토요일, 나는 고향으로 내려가는 버스를 탔다. 마스크 위로 올라오는 버스 특유의 냄새, 창문 너머 스쳐가는 여름 들판을 바라보며 괜히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다.
엄마 집에서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돕고 엄마와 함께 리모컨을 붙들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방에 ㄷ르어와 문을 닫자마자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민아였다.
"여보세요."
"한서! 오늘 내려왔지? 통화 돼?"
"응, 저녁 먹고 방금 방에 들어왔어."
"야, 너 목소리 엄청 피곤하다?"
"원래 이 시간엔 다 이런 목소리야."
"너 요즘 일 많지? 고생이 많다, 야."
딱히 숨기고 싶지도, 털어놓고 싶지도 않은 기분이라, 애매하게 "그냥, 뭐 그렇지."라고 얼버무렸다. 민아는 한동안 이것저것 안부를 묻다가, 마치 본론을 꺼낼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는 듯 잠시 뜸을 들였다.
"한서야, 너... 소개팅 같은거 관심 있어?"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 앉은 느낌이 들었다. 전혀 예상 못한 말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직접 들으니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너희 동네 살고, 나랑 같은 과 선배였던 오빠 있거든. 예전에 말한 적 있지 않아? 성격 괜찮고, 일도 잘하고. 그냥 너 생각이 나서 물어본다아."
나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손톱으로 이불 끝을 괜히 쥐어 뜯었다.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아,..."
"근데 부담될 필요는 전혀 없구. 같인 동네 사람이니까 한번 친구로 만나보라구 연락이라도 해보라고 하는거야. 아니다 싶으면 안 만나면 그만이잖아."
민아는 최대한 가볍게 말하려고 애쓰는 티가 났다. 나를 배려하는 마음도 느꼈다.
"글쎄..."
나는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소개팅을 하는게 잘못된 일은 아니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나에게도 누군가를 새로 만날 권리가 있었으니까. 코로나든 뭐든, 언제까지나 먼 나라에 있는 사람의 연락을 이렇게 기다릴 수 없지 않는가, 그렇게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자꾸 한쪽으로만 기울었다.
"일단 연락만이라도 해봐. 톡 두 세줄 나누고 밥 한 번 먹는다고 결혼하는 거 아니잖아. 네가 진짜 싫으면, 그 땐 그 때 가서 말하면 되니까."
민아의 말에 나는 그제야 작게 숨을 내쉬었다.
"너 번호 넘길게? 친구 만난다고 생각하면 돼. 알지?"
"응, 그럴게."
"연락하라고 할께!"
민아는 반쯤 환호하듯 말하며, 통화를 끊었다. 방 안은 다시 고요가 내려 앉았다.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 순간 LINE알림이 울렸다.
준 아마노 (21:37) - 안녕. 이번 주는 정말 정신이 없었다. 잘 지냈어?
준 아마노 (21:38) - 다음 주말에, 시간 있어? 같이 저녁 먹자!
알림창에 떠 있는 두 줄의 메세지를 보는 순간, 온몸의 감각이 잠시 멈추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 내 앞에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는 두 개의 길을 동시에 내려놓은 것 같았다. 나는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 다시 살짝 놓았다. 나는 한참 동안 대화창을 열어둔 채, 아무 글자도 찍지 못한 손가락으로 화면만 쓰다듬었다. 그에게 보내야하는 문자들이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다. 결국 나는 화면을 꺼버리고 책상 위에 엎어놓듯 툭 내려두었다. 거실 쪽에서 예능 프로그램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세게 흔들어버리고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뒤집어 둔 휴대폰이 옅은 진동을 울렸지만 끝내 확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