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파카바나, 볼리비아
펍에서 돌아온 후 우리는 별다른 대화 없이도 오래 머물 수 있는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마주 앉아 있었다. 은은한 조명 아래 잔을 감싼 그의 손등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는 오늘 하루를 되짚으며 소소한 감상을 툭 던지듯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로 답했다.
이 고요함이, 서로의 온도가 섞인 이 침묵이 좋았다. 그토록 기다렸던 시간, 다시 마주한 이 순간이 애틋했다. 하지만 동시에 펍에서 느꼈던 무거운 공기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가슴 바닥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자러 갈까?”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숙소 중앙의 작은 라운지는 텅 비어 있었고, 계단 쪽에서 희미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같은 층 복도로 올라와 나란히 걷는 동안, 서로의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숨소리마저 의식되는 짧은 거리였다.
그의 방문 앞. 문고리를 잡은 그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잘 자.”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엔 부드러움 속에 어딘가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응… 잘 자.”
한 박자 늦은 나의 대답에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방 안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복도에 짧게 퍼졌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나는 쉬이 발을 떼지 못했다. 한 발짝만 움직이면 내 방이었지만, 발바닥이 바닥에 뿌리내린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복도의 서늘한 공기가 목덜미를 스치는데도 가슴 속은 뜨거운 무언가로 가득 찼다. 답답함인지, 허전함인지, 아니면 미처 전하지 못한 아쉬움인지 알 수 없었다. 자꾸만 펍에서의 순간이 떠올랐다. 나의 요즘을 묻던 그에게 학원, 집, 일터의 반복이라 답했을 때, 그 말들이 그에게 닿기도 전에 공허하게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구나.’ 그 짧은 대답 뒤에는 마치 ‘그게 다구나. 너는 변한 게 없구나. 여전히 그 자리에 있구나.’라는 속뜻이 숨겨진 것만 같았다. 모든 게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을까. 반면 사마이파타의 산속 마을,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분주한 일상, 함께 땀 흘리는 동료들 이야기를 하는 그는 달랐다. 특히 ‘아드리아나’. 그녀의 이름이 그의 입술을 떠날 때마다 그의 눈빛은 생기를 머금고 밝아졌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이야기를 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내가 갖지 못한 생생한 활력이 넘쳤다. 나는 복도에 홀로 서서 여전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연락이 끊겼던 긴 시간 동안 나는 얼마나 그를 기다렸던가. 다시 닿았을 때의 기쁨, 나를 보러 라파스까지 와주었을 때의 꿈만 같던 기분. 하지만 지금, 물리적 거리는 좁혀졌음에도 마음의 거리는 아득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겨우 고개를 돌렸다.
내 방의 공기는 밤의 냉기와 낮의 열기가 뒤섞여 묘하게 미지근했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에 몸을 뉘었지만, 피곤함이 몰려와도 잠은 오지 않았다.
“그렇구나.”
그 무심한 말을 내 입으로 내뱉어 보았다. 그리고 그가 아드리아나를 말하며 빛나던 그의 눈빛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순간, 가슴 한구석이 먹먹하고 쓸쓸했다.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끝내 삼켜버린 말들이 어둠 속을 부유했다. 그가 이미 알고 있을지라도, 내 입으로 꼭 전하고 싶었던 진심은 따로 있었는데.
‘나는 너를 기다렸어. 그게 내 요즘의 전부였어. 학원도, 집도, 일터도, 그 모든 곳에서 나는 너를 생각했어.’
하지만 나는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공기는 차가웠다.
창문을 열자 호수 위로 희미한 안개가 피어올랐고, 잔잔한 파도 소리에 섞여 새들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와 함께 짐을 챙겨 숙소를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가면서 마지막으로 호수를 눈에 담았다.
라파스행 버스는 오전 10시에 출발했다. 차창 밖으로 코파카바나의 작은 마을이 느리게 멀어졌다. 그는 창가에 앉아 나에게 양해를 구하곤 조용히 이어폰을 꽂았다. 나는 옆자리에서 창가에 고개를 기대고 창밖 풍경을 멍하니 쫓았다. 산길을 따라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햇살이 간헐적으로 그의 얼굴을 비췄다. 그 빛 속에서 그는 이미 어딘가 아주 먼 곳으로 떠나는 사람처럼 보였다.
라파스 터미널의 소란을 뚫고 엘알토 공항으로 향하는 동안, 우리는 내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를 유지하며 앉아 있었다. 해발 4,000미터의 희박한 공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 옆에 앉은 이 사람 때문인지 숨이 자꾸만 얕게 쉬어졌다. 산타크루즈로 돌아가는 그의 비행기 시간은 야속하게도 금세 다가왔다.
출국 게이트 앞, 북적이는 인파 속에 멈춰 서자 그가 모자를 고쳐 쓰며 나를 돌아봤다. 할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던 그가,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피곤하지?”
그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불쑥 손을 뻗어, 바람에 헝클어진 내 옆머리를 귀 뒤로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손끝이 귓볼에 아주 잠시 머물다 떨어졌다. 그 짧은 접촉에 심장이 제멋대로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니야, 괜찮아. …너야말로 가서 푹 쉬어.”
나는 태연한 척 대답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지금 내 눈을 보면 흔들리는 걸 들킬 것만 같았다. 우리 사이에 묘한 정적이 잠시 흘렀다. 그러다 그가 한 발자국 다가와 나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기자 익숙한 체향이 코끝에 훅 끼쳐왔다. 그가 이틀 전에 나를 만나 안았던 그정도 강도의 포옹은 아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등에 손을 올리고 토닥였다.
“도착하면 연락해. 알았지?”
그럼에도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다정해서 어쩐지 마음이 아파왔다. 그가 내 어깨를 쥐었다가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응, 너도. 연락할게.”
눈물이 날 것같았지만 꾹 참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보고 싶을 거야’라는 말 대신, 안전한 약속만을 남겼다. 그는 짐을 들어 올리며 뒤돌아섰다. 보안 게이트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여전히 손 끝엔 그의 옷자락이,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눈물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고 그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잘 가.”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인사를 삼키며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들어가고난 후, 나는 그 자리에서 마음이 무너져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 동안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우리는 잠깐 연락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대화의 간격은 넓어졌고, 서로의 하루는 다시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렇게 마음이 또 한 번, 무너지길 반복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와의 계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