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섬 (2018년 4월)

코파카바나, 볼리비아

by 한서


점심을 마치고 난 뒤, 우리는 호숫가의 배에 올랐다.


배가 천천히 움직이자 호수는 넓고 깊은 파란빛을 드러냈다. 햇볕은 유리처럼 맑았고, 수면 위에 부서지는 빛은 작은 은조각처럼 반짝이며 흩어졌다. 섬에 닿자 돌계단이 경사를 따라 이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고대 잉카의 계단과 테라스가 양옆으로 반복되고, 그 사이에는 옛 벽돌 잔해와 풀잎들이 섞여 있었다. 당나귀 한 마리가 느릿하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어딘가선 아이들이 알파카 끈을 잡아끌며 지나갔다. 인간의 목소리는 작았고, 동물 소리와 바람 소리가 더 커 보였다. 나는 한 걸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돌담을 손끝으로 짚을 때마다 따뜻한 열기가 전해졌다. 언덕 위에 오르니 티티카카 호수는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푸른 수면이 구름의 그림자를 천천히 삼키며 흘러가는 모습은, 시간조차 느려진 듯 보였다. 나는 오래 바라보았다. 눈앞의 풍경 때문인지, 옆에서 바람을 맞고 서 있는 그 때문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서 있으면서도, 여전히 내 마음 한쪽에서는 우리가 가까운지 먼지 알 수 없는 묘한 감각이 끊임없이 고개를 들었다.


해가 기울 무렵, 우리는 다시 배를 타고 코파카바나로 돌아왔다. 마을 뒤편 언덕 위 전망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좁고 가파른 길을 오르는 동안 숨은 거칠어졌지만, 그 피로를 잊게 할 만큼 호수는 점점 더 눈부신 색으로 물들어 갔다. 정상에 서자, 티티카카 호수는 주황과 보랏빛이 겹겹이 스며든 채 잔잔히 빛나고 있었다. 파도 위로 번진 노을빛은 숨결처럼 일렁이며 사라졌다. 나는 그 장면이 믿기지 않는 듯 오래 바라보았다. 바로 옆에 서 있는 그의 기척이 낯설만큼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와 나 사이의 거리는 이 풍경처럼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손끝으로는 닿지 않는 듯 아득하게 느껴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어깨가 스칠 듯 다가왔지만, 그 거리는 금세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노을을 향해 감탄사를 흘렸지만 사실은 옆에 있는 그에게 더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동안 말 없이 하늘과 물이 닿는 그 어딘가를 멍하게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가 옆에서 낮게 중얼거렸다.

"いいな…"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응, 좋다."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호수가 바다 같아서도 그렇고, 너도..."

그리고 그 뒤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덧붙였지만 바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 말 끝을 붙잡고 싶었지만 나는 대답 대신 눈앞의 호수에 시선을 더 오래 담갔다.


밤이 내리자, 우리는 마을 안 작은 펍으로 들어갔다. 그 곳은 여행자들로 붐볐다. 웨이터는 반쯤 비워진 맥주잔들이 어지럽게 놓여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곧 치워주겠다고하곤 서둘러 돌아갔다. 조명은 어둡지만 따뜻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네온사인 불빛은 창에 번졌고, 오래된 나무 탁자위에 맥주잔이 부딫히며 낮은 소리를 냈다. 잠시 후 자리를 안내하던 웨이터가 다시 돌아왔고 나와 그는 생맥주 두 잔과 피자 한 판을 주문했다. 그와 나는 식당 내부를 휴대폰 카메라로 찍었다. 그리곤 서로의 행동이 너무 똑같아서 웃어보였다. 웨이터는 먼저 주문한 생맥주를 가져다주었고 목이 말랐던 나와 그는 술잔을 부딪힌 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는 이 곳에 걸어 올라올 때부터 이어오던 사마이파타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힘들긴 한데, 이상하게 재미있어. 아침부터 밤까지 뛰고도, 밤 되면 또 사람들 만나서 얘기하게 돼.”

말을 이어갈수록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다 좋아. 특히… 아드리아나라고, 되게 적극적이거든. 아이디어도 많고, 막히면 먼저 나서서 분위기를 바꿔.”

그 이름이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올 때마다 눈빛은 조금 더 밝아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갓 나온 피자 조각을 베어 물었다.

뜨겁게 녹아드는 치즈의 기름진 맛이 혀끝에 오래 남았다. 대화는 끊기지 않고 흘렀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반 박자 늦은 자리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의 표정이 “좋다”는 말과 함께 환히 빛날 때마다, 마치 호수 위 햇빛이 반짝이다가 금세 눈부심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가 그 빛 뒤로 점점 흐려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가 말을 멈추고 나를 살폈다. 그는 잔을 굴리듯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 신나는 일 있어?"

어깨를 으쓱하며 나는 그저 웃어보였다.

"학원, 집, 일터. 그게 다야, 요즘엔."

말이 입술을 떠난 순간, 이상하게도 민망한 정적이 흘렀다. 그는 잔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렇구나."

짧은 그 대답이 이상하게 길게 남았다. 유난히 시끄럽던 펍의 음악과 웃음소리조차 그 순간엔 멀리 밀려난 듯, 테이블 위에 그의 그 한마디가 오래 울리고 있는 것같았다. 그러다 다시 그는 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산속 마을의 공기, 동료들, 고단함 그럼에도 자신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같다는 말을 이었다. 그의 눈빛은 빛났다. 그 열정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었지만, 어느 순간 다른 데를 보는 순간이 잦아졌고 취기에 다시 머리가 아파와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자고 제안했다.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처럼, 나를 걱정어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곤 일어났다.


그날 밤, 펌에서 나와 전망대로 올라가서 쏟아지는 별을 함께 보자고 했었지만 다시 언덕을 오를 기운은 남아있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호수 위로 마을의 불빛과 달빛이 엉겨 부서져내리고 있었다. 나와 그는 시끄러운 그 곳에서 빠져나와 멀리 호수를 바라보며 말없이 숙소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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