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파카바나, 볼리비아
차창 밖으로는 바위산과 눈 덮인 봉우리가 번갈아 나타났고, 햇살은 산자락에 부딪히며 금빛을 흘렸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공기가 묵직해져 귀가 서서히 막혔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켜 보았다. 잠깐 귀가 뚫리는 듯하다가도 곧 다시 막혔다. 이번엔 코를 막고 숨을 세게 내뱉었지만, 먹먹한 울림은 여전히 귓속에 남아 있었다. 게다가 머리까지 아파왔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괜찮아?”
그가 물었다.
“머리가 좀 아프네.”
“약 있어?”
"아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곧 도착할테니까 조금만 참자."
"응."
대화는 짧게 끊겼고 두 사람 사이는 다시 고요해졌다. 창밖 풍경이 장엄하게 펼쳐지고 있었지만 내 시선은 자꾸만 창문에 비치는 그의 모습쪽으로 흔들렸다.
나는 생각보다 그를 많이 좋아했다. 그와 홈스테이를 함께 하면서, 아니 어쩌면 그와 처음 내가 만났던 내 방문 앞에 서 있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풍경 때문인지 그가 내 옆에 있어서인지 왜인지 모를 설렘 그리고 불안이 파도처럼 번갈아 밀려왔다. 이 여행이 나와 그를 어디로 데려갈까.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자꾸만 무거워졌다.
햇살은 창을 타고 따뜻하게 쏟아져 들어오고 버스의 잔잔한 진동이 몸을 흔드니 졸음이 밀려왔다. 나는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가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무심코 눈을 떴을 때 머리카락 사이로 낯선 온기가 전해졌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창가가 아니라,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심장이 불현듯 크게 뛰었다. 흠칫 몸을 일으키자 그는 조용히 웃었다.
"아, 미안."
"더 자도 되는데,"
나는 얼굴이 달아올라 서둘러 몸을 바로 세웠다. 괜히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숨을 고르다가 고개를 돌리니 차창 밖으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끝없이 펼쳐진 수면이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는 티티카카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숨이 멎을 듯한 풍경에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우와'하며 창가로 얼굴을 가져다 댔다.
정류장에 내려서자마자 공기가 확 달라졌다. 라파스의 탁한 매연 대신, 호수에서 불어오는 습기 섞인 바람이 코끝을 간질였다. 배낭을 멘 외국인 여행객들이 삼삼오오 좁은 길을 오르내리고 있었고, 현지 상인들이 작은 가게 앞에 의자를 내놓으며 손짓을 했다. 마을은 조용했지만, 낯선 활기가 천천히 스며 있는 듯했다.
전날 예약해둔 숙소는 호숫가로 내려가는 길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래된 벽돌 건물의 철문을 열고 들어서니, 무뚝뚝한 주인이 여권을 확인한 뒤 열쇠 두 개를 건넸다. 금속 열쇠는 묵직했고, 손끝에 닿자 차가운 감촉이 스며들었다. 그는 열쇠 하나를 받아들고 같은 층 복도를 따라 걸어 올라갔다. 방문 앞에 잠시 멈춰서서 “조금 있다가 보자”라며 손을 가볍게 흔들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복도에 짧게 울렸다. 10분 뒤, 다시 그와 마주했다. 각자의 문을 나서 마주 본 순간 어색한 미소가 오갔고, 함께 숙소를 내려왔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어가자 시야가 트이면서 호수가 점점 가까워졌다. 조금 더 내려가자 언덕 아래로 티티카카 호수가 한눈에 펼쳐졌다.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깜빡이는 수면은 끝없이 이어졌고, 바람이 스칠 때마다 잔물결이 일렁이며 모래사장을 적시고 있었다. 호수라기보다 바다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멀리서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파도는 부드럽지만 단단한 리듬으로 해안을 두드렸다. 수평선 너머로 이어지는 티티카카 호수는 파도를 일렁이며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 광활한 풍경 앞에서, 이곳이 바다가 아니라 3800미터 고산 위의 호수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점심은 호숫가를 따라 늘어선 포장마차 식당에서 먹었다. 한국인 여행객들에게 익숙한 곳이라고 그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불판 위에서는 커다란 송어들이 기름기 어린 껍질을 바삭하게 태우며 지글거렸고, 고소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천천히 번졌다. 연기는 잠깐씩 눈을 따갑게 했지만, 배가 고팠던 탓에 그마저도 군침을 돋우는 향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라임과 삶은 감자가 곁들어진 송어 구이 두 마리가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금방 불에서 내려온 살점에서는 아직도 김이 피어올랐다. 나는 참지 못하고 젓가락을 들어 껍질을 살짝 젖히자, 흰 속살이 부드럽게 갈라졌다. 한 조각을 입에 넣자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와, 진짜 맛있다.”
내가 감탄하자 그는 짧게 웃으며, 똑같이 젓가락을 들어 살을 발라 먹었다. 식탁 위에 놓인 레몬을 짜서 송어 위에 뿌릴 때마다 상큼한 향이 튀어 올랐고, 바람은 호수 쪽에서 불어와 식탁보 끝을 파도처럼 흔들었다. 금새 접시 위는 빈 뼈만 남아 갔다. 식탁 위엔 접시에 포크와 숫가락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그러다 그는 잠시 손을 멈추더니, 가방에서 작은 약봉지를 꺼냈다.
“아까 머리 아프다 했잖아. 있다가 이거 먹어.”
타이레놀 두 알과 물컵을 건네며 시선으로 챙기듯 내 눈을 마주했다. 는 약을 삼키며 그를 바라봤다. 생각보다 세심한 그의 모습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호수 위에서 반짝이던 빛이 식당 안으로 번져와 그의 오른쪽 뺨을 비추던 순간이 있었다. 그 짧은 장면이, 이상하게도 오래 기억에 남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