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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 그 잡채: 너무 시끄러운 고독

by 은수달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문학동네, 9쪽


체코의 국민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대표작인 위의 소설은 많은 독자와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소설의 화자인 한탸는 어두침침하고 더러운 지하실에서 맨손으로 압축기를 다루며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폐지를 압축한다. 하지만 그는 파괴될 운명인 폐지 더미에 매력을 느끼고, 쏟아지는 책들을 읽으며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다.


-알라딘 책 소개


내 손밑에서, 내 압축기 안에서 희귀한 책들이 죽어가지만, 그 흐름을 막을 길이 없다. 나는 상냥한 도살자에 불과하다. 책은 내게 파괴의 기쁨과 맛을 가르쳐주었다. (12쪽)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18-19)


철저하게 고독한 상태에서도 주인공은 끊임없이 끼어드는 잡념이나 사색을 통해 자유롭고 영원한 삶을 꿈꾼다. 수많은 텍스트로 이루어진 책을 폐지로 만든다는 설정 또한 흥미롭다. 그러나 어느 날 도시에 나간 그는 거대한 압축기와 신식 시설에서 폐지를 압축하는 사람들을 목격하게 된다. 폐지를 다루면서 휴가를 얘기하는 그들을 보면서 그는 굴욕감을 느끼고, 효율만을 위해 일하기 시작한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공포가 인간을 덮친다. 이 모두가 나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그렇게나 시끄러운 내 고독 속에서 이 모든 걸 몸과 마음으로 보고 경험했는데도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니, 문득 스스로가 대견하고 성스럽게 느껴졌다. (75)


굴욕감에 잔뜩 긴장한 나는 뼛속 깊이 퍼뜩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새로운 삶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더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자 대거 자살을 감행한 그 모든 수도사들처럼. 그때까지 삶을 지탱해 준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그들은 상상할 수 없었던 거다. (106)


노동으로 소외된 동시에 노동 너머의 삶을 꿈꾸는 주인공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던 걸까. 근대화로 인해 점점 기계화되는 인간의 자화상을 객관적이면서도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고, 지켜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상기시켜 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85-86)라는 구절을 통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더라도 그 안에는 연민과 사랑이 깃들어 있으며, 그것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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