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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달 Dec 20. 2024

숨어 있기 좋은 방: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제목부터 흥미로운 이 소설은 아베 코보의 대표작인데, 1962년에 출간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 준 작품이기도 하다.


곤충 채집을 나선 남자가 마을 사람들의 계략으로 모래 구덩이에 갇히게 되고, 모래에 집이 파묻히지 않도록 매일 삽질을 해야 한다. 작가는 사막과도 같은 만주에서 살았던 경험과 치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모래 속 인물들을 감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알라딘 책 소개)


물론 모래는 생존에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면 정착은 과연 생존에 절대적으로 불가결한 것인가. 정착을 부득불 고집하기 때문에 저 끔찍스러운 경쟁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사막에도 꽃은 피고 벌레와 짐승도 산다. 강한 적응력을 이용하여 경쟁권 밖으로 벗어난 생물들이다. (모래의 여자, 20쪽)


환경이 바뀌면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모습은 종을 뛰어넘어 보편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노인의 안내로 부락 가장 바깥쪽 사구의 능선에 접해 있는 구멍에 도달한 남자는 곤충 채집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여자의 몸짓에 기분이 누그러져, 이런 밤을 보내는 것도 흔치 않은 경험이라고 자신을 설득하였다. 더구나 잘하면 희귀한 곤충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곤충이 얼씨구나 하고 눌러살 만한 환경이었다. (28쪽)


여자가 엎으려 몸을 뻗고는, 웃으면서 등잔불의 심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금방 다시 불꽃이 밝아졌다. 여자는 엎드린 자세로 불꽃을 쳐다보면서, 여전히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다. 아무래도 일부러 보조개를 보이려는 것 같아,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다. 한 가족의 죽음을 얘기한 직후라서 더욱 음란하게 여겨졌다. (34)


정체를 알 수 없는 장소에서 만난 여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태도를 보이면서 남자를 두려움에 떨게 한다. 



노예들의 구멍은 지금 길 오른쪽에 줄지어 있다..... 군데군데 삼태기를 끌고 가는 고랑의 곁가지가 있고, 그 끝에 묻혀 있는 닮아빠진 가마니가 구멍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168)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주인은 노예의 인정을 받아야만 존재할 수 있다. 동시에 주인은 노예를 자기와 동등한 자의식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진정한 자아상에 도달하지 못한다. 노예는 복종과 훈련을 통해 자신의 주인이 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노예는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가마니의 구멍을 통해 빠져나가려고 애쓴다. 그럴듯한 풍경을 지키기 위해서 노예의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 사이사이에 박혀 있는 백 엔짜리 동전과, 가축과, 아이들과, 성욕과, 차용증과, 간통과, 향로와, 기념사진 등...... 소름 끼치도록 완벽한 반복...... 그것이 심장의 고동처럼 생존에 불가결한 반복이라 할지라도, 심장의 고동만이 생존의 모든 것이 아닌 것 또한 사실이다. (169)


숨어 있기 좋은 방에서 우린 타인의 삶을 훔쳐보고 부러워하거나 일상을 반복한다. 완벽해 보이지만, 생존 이상을 추구하는 존재에겐 더 이상 완벽하지도, 만족스럽지도 않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모래의 집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모래를 허물고 새로운 형태의 세상을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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