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연애 상담을 해주면서 위와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마다 관계에 대한 정의가 다르고, 감정에도 온도 차이가 있으며, 적당한 거리에 대한 기준도 다르다. 그래서 우린 금방 가까워졌다가도 준비 없이 이별을 통보받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같은 사건이나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극명하게 차이 날 수 있음을 주인공을 통해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그건 사실이었다. 엄마는 집에 있을 때, 아무 말 없이 그저 나를 바라보는 것으로 하루를 다 보내곤 했다. 양로원에 가고 처음 며칠은 자주 울었다는데, 그건 습관 때문이었다. 아마 몇 달이 지나, 집에 다시 데려오려고 했다면 그래도 습관 때문에 울었을 것이다. (18쪽)
작품 속 주인공은 엄마에 대한 애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타인처럼 거리를 둔 채 묘사한다. 엄마에 대한 죄책감을 덜기 위해 그는 '습관'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한다.
그들은 기운 없이 우울한 얼굴로 묵묵히 앉아 있기만 했다. 모두 한결같이 관이나 지팡이, 혹은 눈에 띄는 모든 것 중에 한 가지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여자는 여전히 울었고 그녀를 알지 못하는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32쪽)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과 그들을 대하는 주인공의 심정이 솔직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작품 전반에 걸쳐 이어지다 주인공 앞에 한 여자가 나타나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해변으로 나와 옷을 갈아입는데 마리가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급히 버스를 갈아타고 돌아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침대로 뛰어들었다. 열어 둔 창문으로 여름밤이 우리의 짙은 갈색 몸 위로 흘러들어와 상쾌했다. (92)
마리에 대한 사랑이 커질수록 그의 내면엔 불안도 커지고, 무심함으로 불안을 감추려 한다. 변화를 원하지만, 막상 변화가 닥치면 도망가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파리에 출장소를 설치하고 현지에서 직접 큰 회사들과 거래를 하려는데 혹시 그쪽으로 갈 생각이 있는지 내 의견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파리에서 생활할 수 있고 일 년에 얼마 동안은 여행도 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사람이란 대개 생활을 바꾸기가 쉽지 않고, 어떤 생활이든 비슷비슷하며, 또 이곳에서 생활하는 것에 그렇게 불만이 있지도 않다고 대답했다. (108)
화자의 말처럼 생활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용기가 필요하지만,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게 되어 있다.
저녁에 마리가 와서 자기와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결혼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108)
결혼이라는 중대한 사안조차 상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그의 태도는 모험심과 야망으로 가득 찬 남성상과는 거리가 멀다. 자신의 삶을 마치 남의 인생처럼 거리를 둔 채 바라보는 모습은 작품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평화롭게 흘러가던 그의 일상은 레몽에게 받은 권총과 우연히 마주친 아랍인들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는다.
내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손으로 권총을 힘차게 잡았다. 방아쇠는 당겨졌고, 매끈한 권총 자루의 배가 만져졌다. 바로 그 순간 짤막하면서도 귀를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게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다. 그리고 한낮의 균형, 행복을 느끼던 바닷가의 침묵도 깨트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152)
총자루를 건네준 건 레옹이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아랍인에게 총을 쏜 건 주인공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자,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노크가 되고 만다.
엄마의 죽음에 대한 무심함과 지나치게 솔직한 성격은 심문받는 과정에게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어느 정도는 바라기도 하는 법이라고 말하자 변호사가 매우 흥분한 듯 내 말을 가로막았다.
그렇지만 나는 육체적 욕망이 감정보다 앞서는 것은 당연하다고 설명했다. 엄마의 장례식 날도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으며, 확실한 것은 엄마가 죽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것뿐이었다. (160-162)
위협적인 판사의 태도에도 그는 꿋꿋하게 소신을 밝히지만, 판사는 자신의 신념을 그에게 강요하며 짓지도 않은 죄까지 뒤집어씌우려 한다. '나는 한참 생각한 뒤에 사실은 후회하는 것보다 권태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174) 주인공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처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진정으로 이해받는 것이리라. 하지만 열 달 넘게 심문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형무소에 갇히게 된다.
처음에는 내가 형무소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막연히 어떤 새로운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마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방문 뒤에 시작되었다. (178)
위의 문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인생은 결코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우리는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좋은 방향이든 그렇지 않든. 우발적인 행동이 때론 파국을 불러오고, 돌아갈 수 있는 상황 앞에서도 망설인다. 삶의 부조리 앞에서 우린 정상인처럼 연기할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이방인으로 남을 것인가. 어쩌면 알베르 카뮈는 이러한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