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이별을 주제로 작가의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 삶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또한, 일인칭 관찰자 시점을 활용해 여행자의 시선으로 주위 사람들과 세상을 이해하려는 모습이 덤덤하게 그려진다.
누군가 다른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한동안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는 상황이 되면 종종 드는 생각이지만, 흑인 안내인이 한순간 돌변해서 나에게 해코지를 해올 것만 같았다. 나는 외투에서 아침에 보스턴을 떠나오기 전에 샀던 신문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머리기사를 가리키면서, 미국 달러에 대한 몇몇 유럽 국가의 통화 가치가 오른 탓에 여행 경비로 환전해 온 몇 푼을 제외하고는 남는 것이 없게 되었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13쪽)
미지의 세계를 향한 두려움이 가득한 주인공은 전 여자친구 쥬디스를 찾아 미국 전역을 돌아다닌다. 그는 그녀와의 관계를 되짚어보며, 그녀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혼란과 불안을 느끼게 했지만, 그녀를 여전히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미국에서의 두 번째 날을 맞으면서 그는 스스로 변했을 거라는 기대감이 생기지만, 한편으론 주위의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어딜 가나 본모습을 숨기려는 강박관념을 나는 마침내 벗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주어진 상황과 환경에 주의를 기울이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여전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몇 개의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어느덧 가로등이 불빛을 밝혔고 하늘은 푸르디푸르게 빛났다. 나무 아래 목초들은 석양의 미광을 반사했다. 뜰 안의 덤불숲에서는 꽃잎들이 바닥으로 똑똑 떨어졌다. 다른 편 거리에서는 덩치 큰 미국 자동차의 문이 닫히는 것이 보였다. (21쪽)
영화 <소울>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위의 구절을 통해 독자는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미국의 골목길을 여행하며 주위 풍경을 눈앞에 선명하게 그릴 수 있다.
2부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와 내면을 깊이 파고들면서 사랑의 본질에 의문을 가지고 스스로 답을 찾아보게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서로를 진정으로 배려하는 것인지를 여전히 몰랐다. 둘 중 한 사람이 어떤 일을 한다고 했을 때, 다음번에도 그 사람이 그 일을 또다시 맡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그 일을 맡는 것도 아니었다. 일마다 매번 새로이 타협을 봐야 했다. (117쪽)
하지만 감정을 진정시키려는 노력이 외려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화근이 되기도 했다. 그들은 다시 안정을 찾으려고 서로 붙어 있었으나 가능한 한 말은 삼갔다. 그저 애무하고 포옹하면서 좁은 공간에서 가까이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신경이 더욱더 예민해져서 권태감도 더해갔다. 그래도 서로 애칭을 불러가며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116쪽)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웹툰 제목처럼 서로의 존재가 지옥까진 아니더라도 붙어 지내기 때문에 생길 수밖에 없는 권태와 분노는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 장애물이자 인생의 숙제이기도 하다. 자신과 끊임없이 타협하며 살았던 그는 헤어진 연인을 찾아 미국으로 떠나왔지만, 그곳에서 일상의 섬세한 움직임이나 풍경에 집중하면서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근래에 들어 처음으로 오랜 여운을 남기는 삶의 기쁨을 느꼈다. 평소와 달리 흥분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먹고 마셨다. 나는 나 자신과 타협을 봤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서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움직임이 적어져 게으름에 가까운 상태였다. (중략) 반면에 일상적인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섬세한 움직임에는 호감이 간다. 이를테면 적절한 순간에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꺼내는 이별의 몸짓, 단호한 대답을 대신하는 정중 하면서도 공감이 가는 표정, 종업원이 건네주는 거스름돈을 돌려줄 때의 근사한 제스처. (127쪽)
매일 마주치는 풍경과 주위 사람들이 권태롭게 느껴지는가. 지옥인 줄 알면서도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자꾸만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드는가. 낯선 곳에서 자신조차 몰랐던 모습을 발견하고,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는 소설 속 주인공처럼 가끔은 새로운 나를 찾아 떠나거나 일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