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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내 옆에 있는 사람

by 은수달


연말이나 연초가 되면 유난히 생각나는 책이 있다. 그것은 이병률의 여행산문집 『내 옆에 있는 사람』이다. 수많은 에세이 중에서도 유난히 기억에 남는 건 작가 특유의 문체뿐만 아니라 그가 가진 남다른 시각과 섬세함 때문이리라.


몇 년 전, 이병률 작가를 어느 도서관의 강연회에서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책에 사인받으며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찍는 건 괜찮지만 다른 매체에 올리는 건 삼가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 약속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강연을 통해 삶의 가치관과 통찰력이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났고, 독자들한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건지 읽을수록 더 잘 느껴졌다.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거든,

많이 먹지 말고 속을 조금 비워두라.

잠깐의 창백한 시간을 두라.

혼자 있고 싶었던 때가 있었음을 분명히 기억하라.

어쩌면 그 사람이 누군가를 마음에 둘 수도 있음을,

그리고 둘 가운데 한 사람이

사랑의 이사를 떠나갈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라.

다 말하지 말고 비밀 하나쯤은 남겨 간직하라.

(중략)

만날 때마다 선물 상자를 열 듯 그 사람을 만나라.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거든.


위의 구절에서 무엇보다 ‘사랑의 이사’라는 단어가 마음에 와닿았다. ‘시절 인연’이라는 말처럼 사랑도 우정도 영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린 마치 그 시간이 영원할 거라고 착각한다. 작가의 말처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이를 마음에 두거나 사랑의 이사를 떠나갈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둔다면 실망하거나 상처받을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시간은 있습니다.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새에게도 나무에게도. 모두에게 아름다운 시간은 있는 법입니다. 아무리 별것 아닌 풍경이고 시간이라 해도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기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이병률 작가는 아름다운 시간을 발견하고 별것 아닌 풍경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는 것도 여행의 이유 중 하나라고 얘기한다. 오래전, 카페 일을 그만두고 잠시 쉴 때 작정하고 대전이라는 도시를 방문한 적이 있다. 대학 시절 동경의 대상이었던 카이스트 캠퍼스를 꼭 가고 싶었지만, 기회는 생각보다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더 늦기 전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뭔가에 홀린 듯 대전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대전역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를 보고난 뒤, 택시를 타고 드디어 카이스트로 향했다. 캠퍼스를 둘러보고 연못에서 놀고 있는 오리들을 구경하다 보니 다른 세계로 건너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높은 산으로 해 지는 풍경을 보러 올라가 넋을 놓고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알 수 없이 차오르는 마음 안쪽의 부드러움을 대면하는 순간, 맨발로 돌길을 걷고 걷다가 문득 푸른 잔디를 만나 발이 고마워하게 되는 순간, 낯선 방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이 방은 어떤 사람들의 어떤 이야기들이 거쳐 갔을까 하고 낭만을 상상해보는 순간, 그 자잘한 순간들은 모이고 모여 한 장의 그림이 돼. 그림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안절부절못하고 아웅다웅하는 일상하고는 전혀 다른 재료로 그려진 것이라는 것.



‘그래. 바로 오늘이야.’


점점 더 짧아지는 가을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간직하고 싶어서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고 무작정 가덕도로 향했다. 늦가을의 일몰은 대략 5시 30분경. 그 시간이 지나면 야속하게도, 해는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렇게 삼십 분 정도 도로를 달려 도착한 곳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서둘러 주차한 뒤 노을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꺼냈다. 셔터를 누르면서 감탄사를 내뱉느라 바빴고, 달아나려는 가을을 좀 더 붙들어둔 것 같아서 뿌듯했다.


이 사실을 알기까지 오래 걸렸습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절대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요.

내가 사람으로 행복한 적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왜 그 사람이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얼마큼의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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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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