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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글고기 Dec 25. 2016

고양이를 부탁해

페미니즘 비평

“성추행이나 성폭행 피해자들은 미디어에서 보면 다 그렇잖아. 집 안에 틀어박혀 있거나 공황장애를 앓거나 어쩌면 평생 동안 남자를 기피하게 되는 것처럼 그려지잖아. 그런데 그런 일이 있은 후에 나는 오히려 남자 친구가 생기고, 자유롭게 여행을 다녔고, 성에 대해 궁금했기에 내가 아주 괜찮은 줄 알았어. 내 안에 생채기 가득한 그때의 ‘나’는 아직도 울고 있는데, 나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나는 빨리 그런 일의 피해자라는 딱지부터 떼고 싶었어. 주변 사람들도 내가 그 일에 대해 운을 떼려고 하면 먼저 ‘괜찮다.’라고 대답해버렸으니.” 

창밖에는 첫눈이 오고 있었고 커피는 식어갔지만 머그컵 손잡이 위 친구의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렸다. 친구의 얘기를 듣게 된 그 날은 내게 가부장제 짙게 배인 세상의 구조, 가치, 질서를 마주보고 싶게 만들어준 그런 날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뚜렷한 여성억압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누군가 말했다. 나 역시 ‘여성 감독님이 여성 배우들을 대거 등장시켰기에 페미니즘이 스티커처럼 붙은 건가?’라고 생각 했다. 그러다가 ‘뚜렷한 여성억압이 드러나야 페미니즘 영화라는 생각에 깔려있는 기제는 무엇인가?’라고 다시 반문해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말은 페미니즘을 성별 이슈, 성별 적 이항 대립의 논리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가부장적 사유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드러내는 것이었다. 


 ‘대안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 정재은 감독이 이 영화 속에서 말하고 싶은 진짜 페미니즘이다, 인천 부둣가 변두리의 빈민촌 사람들, 동남아 외국인 노동자들, 중국 화교, 뇌성마비 시인이 주인공들과 함께 등장한다. 한국 사회에서 소수자, 타자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이다. 이들과 여성의 억압과 차별의 역사는 함께 걸어간다. 이들의 경험이 밑바탕이 되어 사회 재구성의 원칙으로 인식되고, 페미니즘은 새로운 세계관이 된다. 

 미디어 속에서 한 인간처럼 표현된 여성을 본 게 참 오랜만이다. 다섯 명의 인물들이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단짝처럼 반갑고 편하며 언젠가 내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을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몽상가 태희, 유쾌한 비류와 온조, 얄미운 깍쟁이 혜주, 꿈 많고 섬세한 지영은 성격도, 삶에 대한 가치관도 가지각색이다. 

 지영은 조부모와 매일 지붕이 조금씩 내려앉는 집에서 살고 있다. 정리해고를 당하고 친구들한테 돈을 빌리게 된다. 구직을 위해 찾아간 면접관들은 쉰 소리나 하고 있다. 유학을 가서 디자인 공부를 하고 싶지만 현실은 하루를 살아내기에도 녹록치 않다. 

 지붕이 내려 앉아 함께 살았던 조부모가 모두 돌아가신다. 경찰에게 취조당하고 분리 소년원으로 끌려가는 지영은 이 영화에서 가장 불행한 처지에 놓여있다. 경제적 또는 사회적 계급, 성별, 나이 등이 주는 다양한 억압의 굴레들이 지영을 옭아맨다. 하지만 그녀의 정체성은 단순히 피해자로 규정지어지지 않는다. 영화는 그녀가 여성이며 고아에다 저소득층이라는 사실들이 병렬되며 누군가와 불행을 경쟁하듯 재현하지는 않는다. 그녀의 정체성은 다양한 사회적 관계와 그 맥락 속에서 복합적으로 생겨난다. 엄청난 고통과 불행을 경험한 피해자가 제일 옳다는 논지의 말들은 정치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대내외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누군가에게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사회적 위치라는 건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아주 복잡한 것이다. 정체성이라는 것도 그렇게 사회적 관계와 맥락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혜주 역시 빽으로 들어간 증권회사에서 억압의 굴레를 경험한다. 콘텍트 렌즈 너머 혜주의 세상은 노력하면 되는 세상이다. 증권회사 직원들과 팀장은 어리고 예쁜 혜주에게 친절하다. 그런 세상에서 혜주는 윗사람들에게 적당한 아부의 말들과 눈치 빠른 움직임이면, 언젠가 자신이 승진을 하고 남들이 우러러 볼 지위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제일 현실적이며 영리하다고 믿는다. 혜주는 자꾸 렌즈를 잃어버리지만 책상 아래로 등을 굽혀가며 필사적으로 찾는다. 다른 직원의 손가락 위에서 올려 진 렌즈가 크게 클로즈업 된다. 

 렌즈는 혜주가 결코 보고 싶지 않은, 개인이 바꾸기 힘든, 구조적 문제로 점철된 현실 세계를 가려준다. 하지만 렌즈가 찢어지고 안경을 쓴 혜주의 눈이 지나가던 박대리에게 새우젓이라는 단어로 비하되고 평가 당한다. 또한 팀장이 언급한 저부가가치 인간이라는 단어로 현실 세계에서 혜주의 사회적 위치가 규정되고, 증권회사의 조직 시스템에서 효용성이 평가된다.    혜주는 박대리의 놀림 후에 아예 라식 수술을 해버린다. 자신의 신체를 바꿀 수 있는데 까지 바꿔보고 싶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이런 부분에서 같은 맥락으로 여성들에게 성형을 하고 또 아직도 만족을 못해 다이어트를 하냐고 묻는 멍청한 질문을 한다. 이건 혜주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순응하고 그 지배규범에 자신을 맞추겠다는 것이 아니다. 혜주는 원래 자신의 사진을 커다랗게 인화해 자기 방에 걸어놓을 정도로 자기애가 강하며 자신을 가꾸는 것을 좋아한다. ‘공주병도 환자는 환자지.’라는 태희는 웃는다. 그 말이 어떤 재단 없이 혜주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을 나타내준다.  

 태희는 다양한 타자들과 소통한다. 태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은 사람들이 정해놓은 가치에 따른 위계된 질서에 벗어나 있다. 그녀가 갖고 있는 지식이나 꿈들 역시 지배 담론 밖에서 있는 것들이다. 그녀의 첫 등장은 뇌성마비 시인의 파란 방에서 스타카토의 타자 소리를 내면서였다. 번거롭고 귀찮아도 늘 연락을 도맡으며 친구들을 모으고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같이 놀다 먼저 가버린 지영을 유일하게 신경 쓴다. 속이 불편해도 지영의 할머니가 주는 만두를 거절하지 못하고 우걱우걱 먹는다. 미얀마 사람들이 서툰 한국말로 했던 같이 놀자는 말에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보이며 친구들에게 제안한다. 소처럼 커다란 태희의 눈망울에 담겨지는 것들은 남들이 못보고 지나치는 것들이나 사소한 관심의 손길이 필요한 것들이 담긴다. 태희는 주류와 비주류 사회의 경계에서 그 주변부를 맴도는 다섯 명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영화 초반부에 교복을 입은 다섯 명의 친구들이 군가를 부르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화면은 화이트 아웃되며 카메라는 한 아파트에 창문을 비춘다. 싸움 소리가 들리고 한 물건이 고성 속에서 창밖으로 집어 던져지며 유리가 깨진다. 교복 입은 소녀들과 이어진 그 장면은 꼭 20살이 되어 사회로 내던져진 다섯 명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태희는 그렇게 경계에 서 있는 그 다섯을 제일 잘 대표하는 인물이다. 

 늦은 밤 태희가 심부름으로 만두를 사서 하나를 집어 먹다가, 지영 할머니가 끊임없이 내밀던 만두가 떠올라 무너진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 있다. 익스트림 풀샷으로 쓸쓸한 음악과 함께 그 폐허 가운데 태희는 멍하니 서 있다. 아주 강렬했고 기억할 때마다 소리 내지 못하고 우는 기분이었다. 페미니즘은 모든 경계에 부딪히고 그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경계에 부딪힌다는 것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와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세상을 움직이는 체제의 큰 흐름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깨달음은 경계와 만났을 때 가능한 것이다. 무너진 집은 꼭 경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아슬아슬하며 잘못하면 경계 밖이, 또는 경계 안에 있는 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얘기하는 듯 했다. 그 부분에서 나는 태희는 제일 크고 단단한 벽을 느끼며 자신의 존재와 위치, 현실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인식하는 것 같았다.

 색안경, 렌즈, 본다는 시각장애인을 배제시킨 차별적 언어이다. 또한 비시각장애인의 언어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세요?”, “살펴보니 어떻습니까?”와 같은 말들처럼 보는 것이 아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보통의 비장애인은 그들의 세계에서 너무나 일상적으로 쓰이는 단어들에 어폐를 쉽게 찾을 수 없다. “시간이 촉박하니 화장실에 다녀오실 분들은 빨리 다녀오세요.” 같은 말들도 지체 장애인을 배제시킨 비장애인들이 정해놓은 거리개념이 담겨진 표현이다. 태희가 뇌성마비시인인 주상의 시를 타이핑해주는 일은 이런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 힘겹게 말을 내 뱉는 주상과 언어들을 모아 종이에 담긴 시들이 한 구절씩 책상 밑으로 지나간다. 다시 보니, 어떤 사람도 배제되지 않고 비장애인과 장애인, 주류에 시선에서 타자로 분리되어 온 사람들의 세계가 함께 수렴되는 언어들이 경쾌한 타자 소리와 함께 책상 밑으로 지나간다.

 태희의 어머니가 약이 돌아가는 전자레인지 앞에 멍하니 앉아있는 장면은 모두가 고개를 한번 씩 끄덕이게 된다. 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법한 어머니에 대한 기억파편이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어머니가 해왔던 가사 노동들은 누군가 특별히 알아주는 사람도 없으며 가치가 매겨지지도 않고 금전적인 정당한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가족이 먹을 아침상에 사골 국을 올리려고 밤새 도가니를 우렸던 나의 어머니는 가스 불 앞에서 그 들통만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태희 어머니의 그런 모습은 짧게 비춰졌다. 딸들은 엄마에게 한 없이 미안하다. 큰 죄를 진 기분이 든다. 전통적 가족 제도에서 엄연히 희생당하고 있는 어머니를 보며 딸들은 그 틀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꺼이 그 안에서 본인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성 역할을 자처하겠다는 어머니에게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자레인지 안에 돌아가는 약이 클로즈업되며 배를 타고 강가를 떠다니는 상상 속의 태희가 나온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고 물처럼 흘러가면서 살고 싶다고 말한다. 멍하니 앉아 있는 어머니 다음에 왜 감독은 그 장면을 연결했을까? 영화 속에서 여성의 네러티브는 대부분 남자 배우에게 흡수된다. 독립적으로, 그 자체만으로 조명되는 여성의 네러티브는 드물다. 실제 현실도 다르지 않다. 결혼 전 아내의 직장에 대해 절대로 왈가왈부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받아둔 남편도 아이가 생기면 육아 전담을 이유로 모성애를 들먹이며 직장을 관두기를 요구한다. 나룻배에 누워있는 태희는 모험심과 호기심이 가득한 그 인물 자체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여성으로써 독립적인 네러티브가 있는 삶에 대한 갈망과 의지를 표현한다.   

비류와 온조의 집에 다채로운 색깔의 주발이 드리워진 부엌은 더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후반부에 컴컴한 작은 방 안에서 손바닥만 한 텔레비전을 보며 비류와 온조는 꼭 붙어있다. 시나리오 상에서 비류와 온조에 관한 설정이 머리가 분리된 샴쌍둥이였다는 걸 상상하며, 둘을 지켜보게 된다. 꼭 닮은 쌍둥이 자매의 세계에 부모님이나 다른 이들이 중요하게 등장하는 법이 없다. 추운 날씨에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길거리에서 액세서리 장사를 해도, 초인종을 눌러도 문도 안 열어주는 외할아버지를 방문해도 둘은 힘든 기색이나 슬픈 표정을 짓는 법이 없다. 좀 깎아달라는 꼬마손님들에게 누가 언니인지 맞춰보면 깎아준다는 둘의 엉뚱함이 보는 이를 피식하게 만든다. 비류와 온조는 자신들만이 우주를 만들었다. 그 속에서 항상 유쾌하게 둘만 서로 옆에 있고, 웃을 수 있다면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다.


 질문은 질의하는 사람의 권력을 드러낸다. 어떤 질문은 비장애인이며 젊은 사람, 한국인, 남자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그건 그들이 누리는 당연한 권리이기에 그들은 대답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 해당되는 그 질문은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만 하는, 때로는 이상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욕망으로 고려된다. 영화에서 카메라가 어떤 대상들을 응시하는 것은 이런 질문들과 같다. 카메라가 바라보는 대상과 비춰지는 대상간의 권력관계를 찾을 수 없다. 다섯의 주요 무대였던 인천, 빈민촌, 공장으로 둘러싸인 바닷가, 일하는 사람들 지하철, 국제 여객 터미널에서 수많은 보따리들을 들고 바쁘게 이동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두 평행한 시선에서 응시된다. 

 영화의 제목에도 포함되어 있듯 고양이는 다섯 명의 주인공들을 비유한다. 혜주에게 처음 건네진 고양이는 얌전하지만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갔다. 다시 지영이 데리고 오지만 할머니는 고양이는 영물이라 집에 들이면 안 되는 것이라며 잔소리 한다. 나방을 잡아 지영의 그림 위에 올려놓고, 문을 열면 본능적으로 탈출한다. 길에서 데려온 새끼고양이 티티는 연약하지 않다. 고양이란 것이 원래 목숨이 8개라는 말처럼 보는 사람에 따라 사려 깊게 지켜보면 그 모습도 워낙 다양하여 차이가 생긴다. 남성들은 좌파도 있고 우파도 있고, 가난한 사람, 지식인도 있다. 남성은 개인 또는 인간으로 간주되지만 여성들은 그저 여성으로 간주된다. 이 영화는 이런 부분들을 벗어난다. 기존 영화들은 스무 살이 된 여성은 섹스에 궁금함을 가져야한다는 식으로 오랫동안 재현해왔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은 그런 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다섯은 같은 인천여상을 다녔지만 소득수준이나 가정환경도 조금씩 다르며 성격에도 가치관에도 삶의 방식에도 두드러지는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들이 드러나는 인물들에게 일차적인 억압 역시 모두 다른 양상으로 다가온다. 지영의 일차적 억압이 경제적 억압이라면 혜주가 겪고 있는 일차적 억압은 고졸 출신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시스템의 억압이다. 둘의 억압은 같은 방식으로 이론화될 수 없기에, 혜주와 지영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영화가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고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영화가 여성 해방으로 가는 길이라고 제시하고 싶은 속마음이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핸드폰과 문자는 다섯의 연결고리이며 친구라는 이름으로 묶여있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 질투, 다시 화합하고자 하는 심리들이 세밀하게 담겨진다. 사람들은 여자들 간의 우정은 더 복잡하고 감정적이며 도통 알 수 없다는 말을 한다. 남자들의 우정은 ‘친구’ 같은 영화에서 주먹싸움이라는 폭력으로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남자들의 우정은 좀 더 이성적인 것에 비해 여자들의 우정은 감정적이고 예민하다는 통념들이 존재한다. 여기서 사람들은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이성이 정적이고 합리적이며 위계질서의 윗부분에 위치하지만 감정은 시답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역시 가부장적 사고에 찌꺼기다. 영화가 그렇게 생각되어 왔던 여자들의 우정을 거기에 발맞추어 더 섬세하게 그려낸 것은 감정을 비로소 그 틀에서 꺼내오자는 시도다. 감정이 부재 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사유할 수도 사랑도, 삶이 없다는 결론까지 생각 할 수 있다. 감정이란 움직이고 세상과 대화하는 것이다. 감정은 사람의 즐거움, 열정, 느낌, 생각의 근원이다. 

 이분법 체계에서는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타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우월한 것만이 자율적으로 기능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육교에서 만났던 거지 아줌마에게 자유로워 보인다는 말을 하는 태희를 면박 줬던 지영은 자신과 제일 반대 성향을 가진 태희와 비행기를 타고 떠난다. 나는  마지막에 결국 그 두 친구가 결합한 것이 가부장적 사유의 산물 중 하나인 모든 것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이분법의 사유를 거부한다는 메시지로 보인다. 할리우드 서부극에서 나타났던 동부와 남부, 밤과 낮같은 수많은 대립 항들은 사실 알고 보면 끝이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처럼 연결되고 순환하며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초반에 대립적으로 보였던 지영과 태희가 결국 함께 어딘가 떠나는 것은 이런 맥락과 그 의미를 같이 한다.

 우스꽝스러운 ‘good bye’라는 글자가 올라온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둘의 앞날을 영화는 어떤 복선도 주지 않고 섣부르게 판단하지도 않는다. 스크린 밖의 관객들도 아무런 복선도 단초도 없이 판단 할 수 없는 자신들의 앞날과 그 결말이 참 비슷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태희와 지영이 유토피아 같은 곳으로 영영 떠나는 게 아니라 다시 나와 마주하며 인사를 건넬 것 같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페미니즘 영화란 이래야한다’라는 틀 속에 틀을 깼다. 


참고도서: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지음/ 출판사 교양인) '머리말'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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