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작가 동하 Nov 07. 2020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겠지만, 막상 경험해보니 잠시 당황하게 되는 이야기.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은 날에는 너무도 충격을 받아 사진을 찍지 못하고, 다른 날 어느 카페에 앉아 음미한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베이글, 그리고 책.


동네 카페에 들러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후자를 주문했다. 점원이 잘 못 들었는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요?"라고 되묻는 게 아닌가.


찰나의 시간이지만 '뭐라고 답해야 하나' 고민이 됐다. 대뇌인지 시상하부인지 척수인지 알 수 없는, 뇌의 어느 지점인가에서 뭔가가 마구 굴러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내 평상심을 되찾았고, 냉정하게

"아, 아니요. 아메리카노. 따뜻한 거요"라고 답했다.

"네, 따뜻한 아메리카노 드릴게요"

오가는 주문 대화 속에서 작은 '사고'가 발생했지만, 점원은 자신이 했던 말을 잘 모르는 눈치였다. 설마 손님을 당황하게 할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그런 말을 던지진 않았을 것이다. 설마 내가 당황하는 모습이 궁금해서? 점원의 눈빛 속에서 그런 의도성은 느껴지지 않았다.


'따아'를 기다리면서 앉아 있으려니 피식 웃음이 났다. 머릿속에서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몇 번이고 맴돌면서, 생각할수록 신통한 말이구나 싶었다. '따아아'라는 메뉴가 실제로 있기라도 한 걸까. 그런 메뉴를 만든다면 손님들에게 작은 웃음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못 만들 것도 없지 않나.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얼음을 따로국밥처럼 내주면 된다. 처음엔 따아로 마시다가 좀 지나선 아이스를 넣어 따뜻함에서 아이스의 단계로 넘어가는 메뉴 말이다. 짜장면과 짬뽕이 결합한 짬짜면이나 짜장면과 볶음밥의 볶짜면 등 '따아'와 '아아'를 한 번에 맛보고 싶은 이들을 겨냥한 메뉴다. 메뉴판 한 귀퉁이를 장식한 '따아아' 메뉴. 사진과 함께라면 더욱 눈에 띄지 않을까.


이 메뉴는 따뜻함과 차가움의 물리적 결합이기 때문에 모순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어떠한가.


한국인은 뜨거운 탕을 먹으며 "아, 시원하다"라고 한다. 뜨거운 걸 먹으면서도 시원하다고? 모순된 상황이다. 커피 역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먹으며 그 맛에서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반대로 '아아'를 먹으면서도 그 커피의 향에 가슴이 따스워질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따아아'는 역설(逆說)의 뜻이 담겼다. 역설은 '특정한 경우에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는 논증. 모순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 속에 중요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말한다.


대표적인 역설 표현으로 '찬란한 슬픔'이 있다. 슬픔은 부정적인데 긍정의 표현에서 주로 쓰는 찬란함이라니! 이 표현은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에 등장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모든 식물이 그렇겠지만, 모란도 사실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뜻만 본다면 참으로 무미건조하다. 사전 상의 정의를 한번 살펴보자.


모란 :『식물』 작약과의 낙엽 활엽 관목. 높이는 2미터 정도이고 가지는 굵고 털이 없으며, 잎은 크고 이회 우상 복엽이다. 늦봄에 붉고 큰 꽃이 피는데...


모란은 그러나 건조한 단어에 생기를 불어넣는 시인의 창조적 과정을 통해, 다가올 계절에 대한 기대감을 상징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나도 그날 마셨던 그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의미를 부여해 보련다. 내가 마신 것은 '따아'였지만 분명히 '아아'와 같은 시원함이 있었다. 진정한 '따아아'였다.


"나는 다시 마실 테요, 가슴 시원해지는 그 아를"

이전 06화 삼삼오오 회식, 어디로 가오리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