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하라버지 회 맛있게 먹었어요... 좋아요... 건강하세요.
한글을 이제 막 깨치기 시작한 둘째가 할머니 할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두 분의 건강을 빌면서 지난번 보내준 회를 맛있게 먹었다는 감사함도 담았다. 글자 수는 얼마 안 됐으나 손녀가 생애 처음으로 보낸 편지를 고향에서 받아본 할머니 할아버지는 입이 귓가에 걸렸다.
그런데 작은 소동이 발생했다. 명칭 병렬 순서의 문제였다. 할아버지는 손녀가 예뻐 죽겠으면서도 한 가지 서운함을 나타내신 것으로 전해졌다. 할아버지 김모 씨는 "왜 '할머니'가 '하라버지' 앞에 와 있느냐"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하라버지 할머니'로 표현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섭섭함이었다. 이에 대해 할머니 이모 씨는 "할머니가 앞에 오는 게 뭐가 서운하다고 그러느냐"라고 맞받아친 것으로 알려졌다.
두 분이 티격태격하면서 웃었을 생각을 하니 아들인 나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건 그렇고, 이 일화를 보면서 문득 병렬 어순이 궁금해졌다. 과연 '엄마 아빠'가 맞을까 '아빠 엄마'가 맞을까.
1. 우선 '엄마 아빠'에 대한 띄어쓰기 문의가 국립국어원 온라인가나다에 2010년 3월 22일 올라온 것을 알 수 있다.(온라인가나다에 대한 문의와 결과는 2년 전까지만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지금은 국립국어원에서 검색하면 나오지 않는다. 대신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이 내용이 나온다.)
질문 : '엄마아빠가 알아야 할 것들' 여기서 '엄마아빠'는 '부모'를 아울러 가르키는 말로 자주 쓰이는데, 붙여 써도 될까요?
답변 : 엄마아빠는 한자말 '부모'에 대응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우리말에서는 굳어진 하나의 단어가 아니므로, '엄마 아빠'와 같이 띄어 씁니다.
반면 '아빠 엄마'에 대한 문의는 없고, 포털 상에서도 이에 대한 사전적 답변은 없다. 영어도 대략 분위기는 비슷해 보인다. 'Mom and Dad'에 대한 검색 결과는 옥스퍼드 영한사전 등에 나온다. 그런데 반대로 'Dad and Mom'으로 검색하면 'Mom and Dad'에 대한 결과가 보인다. 일단 '엄마 아빠'의 1승.
2. 국립국어원의 2009년 국어연감에는 조선대 국어국문학과 강희숙 교수의 '사회언어학'이 실려 있다. 강 교수는 “국어 병렬 어순의 유형 및 그 사회언어학적 규칙과 패턴”(장태진)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성년층 연령은 ‘상황 어순’을 즐겨 쓰고, 연소층과 장년층은 ‘동결 어순’을 즐겨 쓴다. 예를 들면, 결혼기 연령은 ‘총각/처녀 vs 처녀/총각, 신랑/신부 vs 신부/신랑’을 상황에 따라 사용하지만, 연소층은 ‘아빠/엄마’, 연장층은 ‘아들/딸’을 찾아 쓴다. 어린이는 ‘엄마/아빠’를 ‘무순’으로 쓰며"라고 했다.
동의가 되는 부분도 안 되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신랑·신부를 상황에 따라 사용한다고 했는데, 결혼식장에서 마지막 순서 '신랑·신부 행진'을 줄곧 들어서 그런지 '신부·신랑'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어린이가 엄마·아빠를 무순으로 쓰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그렇다. 둘째 아이의 경우도 그렇지만, 나 역시 어릴 때 부모님께 편지를 쓰라고 하면 '어머니 아버지께'라고 썼던 기억이 난다.
다만 강 교수는 이 연구에 대해 "국어의 병렬 어순의 사용이 사회언어학적 요인들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지적한 데 의의가 있다"라고 했다. 연구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떠나 어순 역시 사회적 요인들과 상관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3. 국립국어원이 2017년 3월 발행한 '새국어생활'에는 국어학자인 신현숙 전 상명대학교 교수 인터뷰가 실렸다.
신 전 교수는 식당 명칭 중에서 ‘이모네’가 들어간 식당이 ‘고모네’를 사용한 식당보다 많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그러면서 "우리 머릿속에 고모가 반찬을 해 준 기억보다는 이모가 해 준 경우가 더 많을 수 있다. 또 이모라고 하면 엄마 쪽이기 때문에 이게 밥하고 관련이 있는 거죠. 이것도 우리 문화하고 관련지을 수 있는 거겠죠"라고 한다. 그러면서 사회적인 변화에 따라 남자들이 음식을 많이 하기 시작하면 간판이 또 달라질 것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언어와 사회적 분위기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결론. 그런 점에서 둘째 아이가 "할머니 하라버지"라고 쓴 이유를 알 것 같다. 집으로 한 번씩 전화를 거는 건 할머니지 할아버지가 아니다. 내 전화로 영상통화를 할 때도 할머니는 적극적으로 둘째의 안부를 묻지만, 할아버지는 웃으며 "잘 있느냐. 밥 잘 먹고"라고 할 뿐 별말씀을 하지는 않는 편이다. 고향에 내려가도 맛있는 밥을 해주는 분은 할머니다. 할아버지는 반갑게 맞으면서도 어느 순간 친구를 만나러 가고 안 계신다.
결국 손녀의 편지에서 어순을 "할아버지 할머니"로 바꾸는 힘은 단순히 서운함 표시만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정성이 필요해 보인다.
그런 점에선 나도 긴장할 일이다. 아이가 언젠가 커서 우리 부부에게 편지를 보낼 때 "아빠 엄마"라는 말이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