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산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한참을 말없이 걷다가 제이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때도 넌 항상 나보다 반 발 뒤에서 걸었어."
내가 대답했다.
"그래야 네가 어디로 가는지 볼 수 있으니까."
제이가 웃었다. 예전처럼. 그 웃음은 여전히 나를 헷갈리게 했다.
제이가 말했다.
"여기 아직도 있네."
제이의 걸음이 멈췄다. 오래된 분식집 앞이었다. 낡은 간판, 얇은 유리판, 오래된 의자와 식탁.
"라면, 먹고 갈래요?"
제이가 물었다.
"지금 '봄날은 간다' 따라 한 거야?"
내가 되물었다.
웃음이 나왔다. 제이가 새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나 라면 먹고 싶어서."
"그래. 나도, 라면 먹자."
우리는 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섰다. 종 울리는 소리가 우리를 따라왔다. 나는 이곳을 본 것이 꿈 속에서 였는지 아니면 실제 제이와 함께였는지 아니면 제이와 함께 있는 꿈에서였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제이가 나를 구석진 자리로 이끌었다. 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
"여기 앉으면 비 오는 게 잘 보이거든."
제이가 말했다.
나는 제이의 시선을 쫓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가 얇은 창을 치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우산들이 창 밖을 지나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그 장면에서 이영애가 했던 대사는 '라면 먹고 갈래요'가 아니야.”
제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진짜? 그게 아니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냥, ‘라면 먹을래요?’ 였어. 근데 사람들은 다 '라면 먹고 갈래요?'로 기억하더라."
제이가 피식 웃었다.
"기린은 여전하구나. 모든 것을 기억해."
나는 잠시 웃다가 제이를 바라보았다.
제이의 눈은 예전과 같았다. 저 눈을 기억하고 있었다.
“글쎄, 어쩌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걸지도.”
제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때 얘기를 하는 거구나. 미안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디오에선 언젠가 들었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사랑하는 남자를 떠나보낸 여자가 남자를 그리워한다는 내용의 가사였는데 수애가 불렀었는지 정미조가 불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제목이 뭐였더라.
제이가 물었다.
"그래서 기린. 기린은 지금 뭐 하고 살아?"
나는 노래 제목을 기억해 내는 것을 포기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가끔은 쓰고. 그게 다지 뭐."
"쓰고?"
"글. 그냥 가끔. 나 혼자 보는 거."
"아직도 시를 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는 아니고, 그냥 메모. 너처럼 시집을 사는 사람한테 보여줄 수 있는 건 아니고."
제이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 썼던 시. 아직 있어?"
내가 웃으며 말했다.
"없애버렸어. 네 얘기가 너무 많았거든."
제이가 손가락을 들어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제이가 웃었다.
웃음이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제이가 젓가락을 들었다 다시 내려놓았다.
"나는 아직 있어. 네가 썼던 시. 내가 몰래 복사해 뒀던 거."
"진짜?"
내가 물었다.
"응. 그중 한 편은 아직 서랍 속에 있어. 누가 나한테 '기린이 누구야?'라고 물으면 그냥 기린이야, 하고 대답해."
"다른 이야기."
내가 말했다.
“그 시 제목이었지?”
이어 물었다.
제이가 대답했다.
"아니야. 그 시의 제목은 '다른 이름' 이였어."
그녀가 이어 물었다.
“자기가 쓴 시도 기억 못한는 거야?”
그녀가 웃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작게 웃음이 나왔다.
*
계산을 마치고 나오자 비가 조금씩 잦고 있었다.
"너희 집은 이쪽이 아니지?"
내가 물었다.
"응. 그럼. 다시 안녕이네?"
제이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작고 하얀 손. 나의 손을 쥔 채 그녀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돌아섰다.
그녀가 걸어갔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기.”
내가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뒤를 돌았다.
하얀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일 영화 볼래?”
내가 물었다.
그녀가 나를 향해 알 수 없는 미소를 띄우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다시 떠났다.
나는 다시 길을 걸었다.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닐지도 모르는 커다란 두더지를 나는 생각했다.
<오늘은 많이 늦었네요. 출근 시간에 늦을까봐 가슴이 콩닥콩닥 합니다. 소설의 끝을 쓰고 와서인지
18화는 이전 버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기린과 제이의 감정선을 많이 수정하였어요. 그러느라 시간이 더 걸린 것 같네요.
오늘은 비가 내리네요. 어제 집을 찾아간 고양이는 집에서 편안하게 잘 쉬고 있겠지요?
그럼 저는 이제 출근을 하러, 이만....
늦으면 혼나요 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