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질퍽하게 눈이 녹은 운동장엔 얼룩덜룩한 옷을 입은 형 몇과 누나들이 젖은 땅을 피해 어정쩡한 모양으로 줄을 서 있었다. 다 해봐야 내가 다니던 유치원 한 반의 숫자도 안돼 보였다. 어른이라고는 선생님 둘과 멀찍이 뒤 쪽에 서 있는 엄마가 전부였다. 동생은 엄마 옆에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나는 엄마 쪽으로 가지 못했다.
형들이 나에게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애 뒤로 가서 서라고 지시했다. 나는 발이 진흙에 빠지지 않도록 딱딱한 땅을 골라 그 애의 뒤에 가서 섰다. 형들이 낄낄거렸다. 쟤네 둘이 친구래. 어떤 형이 말했다. 분홍색이 뒤를 돌아 나를 흘겼다. 까만 눈동자 주위의 하얀 눈자위가 눈처럼 밝았다. 그 애가 다시 앞을 봤다.
그 애는 입학식 내내 까만 종아리를 내놓고 떨고 있었다. 이따금 손을 불며 겨드랑이에 손을 끼었다. 그 애의 드레스는 얇았다. 나는 파카 주머니 속으로 손을 깊숙이 찔러넣었다.
교실엔 아빠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는 할아버지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짧고 뭉툭한 몸통 옆에 때가 까맣게 낀 지휘봉을 끼고 선생님께서 나무 단상 위로 올라서셨다.
-임하영
선생님이 칠판에 하얗고 크게 이름을 적더니 지휘봉 끝으로 칠판을 쳤다. 가루가 날리고 지우개가 밑으로 떨어졌다. 형이 빠르게 기어나가서 지우개를 주워 올렸다. 바닥에 하얀 자국이 생겼다.
선생님은 자기가 1학년과 3학년, 5학년들을 가르칠 거라고 했다. 선생님이 분필로 칠판을 크게 셋으로 나눴다. 1학년은 분홍색 드레스와 나, 둘 뿐이었다.
선생님이 1학년부터 일어나 자기소개를 하라고 지시하셨다.
“...이에요.”
분홍 드레스가 고개를 비틀며 일어났다가 얼른 앉았다.
“다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이요.”
분홍색이 찔끔 말하고 다시 앉았다.
“크게.”
선생님이 지휘봉으로 교탁을 내리치셨다.
“...영숙.”
분홍색이 긴장한 얼굴로 다시 말씀하셨다.
“더 크게.”
선생님이 소리치셨다. 영숙이의 얼굴이 금방 울 것 같았다.
“영숙이 바보에요.”
뒤에서 형 하나가 외치자 주위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울 것 같던 영숙이가 금방 뒤를 돌아보며 삐죽 눈을 흘겼다. 그리곤 누가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책상에 얼굴을 파묻었다. 형과 누나들이 낄낄거렸다.
“ㅇㅇㅇ 나와.”
선생님이 호명하자 머리통이 밤송이 같은 형 하나가 웃으며 걸어 나와 칠판을 짚고 섰다. 선생님이 지휘봉을 세게 휘두르셨다. 형이 히죽히죽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영숙이는 고개를 묻고 있었다.
졸립네요. 얼른 가서 자야겠어요. 아 졸리당... 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