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이 그렇지만 창업 역시 계획하고 의도한 대로, 생각한 대로 술술 풀리는 경우는 열 번 중 한 번에 불과한 것 같다. 크라우드 펀딩 역시 그랬다. 내가 알고 있던 크라우드 펀딩은 '아이디어는 있는데 자금력이 부족한 개인이나 기업이 시장성을 테스트하고 생산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는 일종의 ‘투자’였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아니었다.
대다수의 펀딩 참여자들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 일종의 공동 구매처럼 크라우드 펀딩을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시장에 출시가 안된 제품인데도 리뷰가 가득한 제품들의 펀딩이 잘됐다. 펀딩 종료 후 곧바로 물건을 받기를 원하는 소비자들도 많았다. 크라우드 ‘펀딩'보다는 크라우드 ‘바잉’에 가까웠다.
또한 알리바바와 같은 B2B 소싱 플랫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제품을 ‘내가 수년간의 연구 결과를 통해서 만들었다'며 홍보하는 제품들도 있었다. 말하자면 해외 소싱을 하기에 앞서 펀딩을 통해 마케팅을 하고, 펀딩 수량대로 주문을 하는 방식이다. 까놓고 얘기하자면, 해외 공장에서 이미 만들어 놓은 제품이라도 한국에 처음 수입하여 판매하는 사람이 ‘내가 아이디어를 냈다’고 말하면 소비자는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다.
스케치부터 시작된 제품. 23년도 3월에는 특허청에 디자인이 등록됐다.
기획 단계부터 아이디어를 고민하고 샘플 하나를 뽑는 데까지 6개월이 시간이 걸렸지만 그 고생이 무색할 만큼 쉽게 제품을 사 와서 수억 원대의 펀딩을 성공시키는 실력자들이 가득했다. 마케팅과 장사에 도가 튼 ‘꾼' 들 사이에서 크라우드 펀딩 초창기 시절의 순수함을 믿었던 나는 애송이였다.
첫 끗발이 개끗발
모든 이커머스가 그러하듯 크라우드 펀딩 역시 ‘상위 노출’이 성공의 핵심 요소였다. 플랫폼마다 정확한 로직은 공개하지 않지만, 오픈하자마자 곧바로 펀딩이 진행되는 사람들의 수가 많을수록 상위 노출의 확률이 높아졌다. 나는 솔직히 펀딩 기간이 2주 정도 되니까 첫날 펀딩 숫자가 적어도 나머지 기간 동안 홍보를 잘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순진했다. 처음에 상위 노출 기회를 잃으면 노출이 거의 안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래서 펀딩 기간 내내 매일 일희일비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경기도의 크라우드 펀딩 스타트업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광고비에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첫날의 실수를 광고 집행을 통해 조금씩 만회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첫날 펀딩 성공률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었다면 이후 집행한 광고 성과도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첫 브랜디드 제품. 고양이 이동장 겸 숨숨집, 쏙백(Sooak Bag). 고양이를 새로운 가정으로 입양할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영역 스트레스를 예방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제품이다.
그래서 결과는? 821%. 순진하게 크라우드 펀딩 시장에 뛰어든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공률이었다. 제품 역시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예쁘고 튼튼하게 완성됐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펀딩 금액만 놓고 보면 사실 초도 물량 생산 비용을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쏙백은 반려묘 입양을 상징할 얼굴 상품이었기 때문에 다른 제품들과 다르게 해외 소싱을 하지 않고 국내에서 명품 가방을 제작하는 공장에 의뢰해서 만들었다. 페트병을 재활용한 GRS(Global Recycled Standard) 인증 원단과 한지로 만든 식물성 비건 레더를 적용했고, 공장에서는 한 번도 제작해 본 적 없는 형태의 상품이었기 때문에 공임비가 높았다. 원가가 높았지만 소비자들이 부담할 수 있는 비용은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마진도 크게 붙이지 못했다.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 생존을 위해서 본격적으로 이머커스에 발을 들여놓아야 할 시점이 도래했다. 아마존에는 쏙백을, 스마트스토어에는 쏙백과 함께 입양 관련 용품을 판매해 보면 어떨까? 아마존과 스마트스토어에서는 또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