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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Oct 31. 2019

과학 속의 인문학

열 두 발자국 - 정재승

 나는 전형적인 문과 성향의 사람이다. 대학도 문과를 졸업했고, 현재 하고 있는 일도 철저하게 문서에 의존하는 일이다. 모든 인문계열 출신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유독 나는 수학이나 과학에 흥미가 없었다. 독서를 해도 나의 취향은 소설이나 자기 계발서, 역사 서적에 한정되는 철저한 편식주의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 분야의 서적을 선택한 것은 저자의 유명세 때문이기도 하고, 제목이 주는 인문학적 느낌 때문이었다.

 『열두 발자국』은 뇌공학과 교수인 저자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책으로 뇌과학의 관점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탐구하는 인문학적 성격이 강한 글이라고 볼 수 있다. 움베르토 에코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열두 발자국』이라는 제목은 ‘인간이라는 경이로운 미지의 숲을 탐구하면서 과학자들이 내디딘 열두 발자국’을 의미한다고 한다.


 책은 1,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에서는 뇌과학자의 입장에서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을 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각 장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의사결정과 선택의 순간에 우리의 뇌는 어떤 상태인지 살펴보면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의사결정을 내린 후에는 빠르게 실행하고 끊임없는 수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1장, 결정 장애는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견해가 2장, 결핍은 욕망을 자극하고 우리를 성장시키는 긍정적 효과를 부르기도 하지만 지나치면 ‘터널 비전’ 현상에 빠질 수 있다는 내용의 3장, 인간에게 놀이는 창의력을 키우는 결정적 행위라는 4장, ‘‘새로 고침’이 쉽지 않은 우리의 뇌에 대한 5장, 인간이 미신에 잘 빠져드는 이유를 설명하는 6장이 1부의 주내용이다.


삶의 성찰 이후에 전개되는 2부의 이야기에서는 미래의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보여준다. 창의적인 사람들의 뇌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 독서와 여행 및 지적 대화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7장, 인간 지성의 미래를 살펴보면서 결국은 인공지능과의 공생을 모색해야 한다는 8장,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미래의 기회는 어떻게 찾고 대처해야 할지를 제시하는 9장, ‘혁명’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는 10장, 순응하지 않고 세상에 도전하되 위험 감수보다는 위험 관리 성향이 강해야 혁신적 아이디어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하는 11장, ‘칼 세이건 서거 20주기 기념 강연’의 일부를 소개하는 12장이 바로 그것들이다.

 전체적으로 공감하고 수긍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으나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전반부의 내용이 더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다. 특히 ‘마시멜로 챌린지’ 사례를 통해 혁신의 개념을 재해석하는 부분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혁신은 계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도를 하고 계획을 끊임없이 수정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작가의  생각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었다. 작가의 말대로 중요한 것은 계획을 완수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완수하는 것인데 때때로 주객이 전도되어 계획을 세우는데 모든 에너지를 쓰는 상황을 우리는 종종 맞닥뜨리게 된다.


 직장의 중간 관료인 나는 크고 작은 사업과 행사를 치러야 하는 부서의 책임자이다. 내가 모셨던 상관 중의 한 분은 관료적이고 경직된 성향으로 계획서 수립에 지나치게 열을 올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혁신을 강조하지만, 사업 초반에 계획을 세우고 계획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면 계획서를 수정하느라 다른 일을 할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계획서는 말 그대로 계획일 뿐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조절하고 수정해서 완수해야 할 일을 충분한 시간을 두고 하지 못하니 늘 쫒기게 되고, 계획 단계에서 이미 모든 것을 평가받는 기분이라 일의 능률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구성원 간의 관계도 이전에 비해 친밀도가 떨어지게 되고 불만의 소리는 점점 커지게 되는 문제점이 곳곳에서 발생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때 느꼈던 답답함을 책을 읽으며 다시 떠올리게 되었고, 내 생각을 지지해주는 직장 동료를 만난 것처럼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수많은 연구 사례를 논리적 근거로 사용하여 다가오는 미래를 위해 개인과 사회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긍정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 역시 과학자의 책다웠으며, 과학자의 책이지만 딱딱하지 않고 나처럼 과학에 문외한인 사람도 쉽게 이해하게 만드는 그의 박식함에 탄복하였다. 또한 책과 다양한 사람들, 여행 등을 통하여 직간접적인 경험을 계속해서 쌓고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균형잡힌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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