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르망디의 연』, 로맹 가리
1930년대 프랑스 노르망디의 클레리에서 뤼도는 연을 만드는 삼촌 앙브루아즈 플뢰리와 둘이 살아간다. 한 번 본 것을 잊지 않는 뛰어난 기억력의 뤼도는 열 살 때 숲에서 마주친 폴란드 소녀 릴라를 사랑하게 된다. 4년 후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가까워지지만 폴란드 귀족인 브로니츠키 집안이 폴란드로 돌아간다. 릴라를 만나러 폴란드로 뤼도가 찾아가 꿈 같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2차 대전으로 서로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된다. 뤼도는 릴라를 찾을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파리로 향하지만 국경은 이미 폐쇄되었다. 파리에서 만난 쥘리부인의 도움으로 ‘레지스탕스’ 조직의 일을 시작하게 된다. 클레리로 돌아온 뤼도는 릴라와의 재회를 꿈꾸며 레지스탕스 활동을 수행하며 나치에 저항한다. 수바베르와 함께 런던에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프랑스인들을 숨겨주는 일을 비밀스럽게 진행하게 된다.
릴라는 살아남기 위해 매춘을 하며 폴란드를 탈출해 파리까지 오게 된다. 릴라의 사촌 한스의 친척 폰 틸러 장군이 노르망디 지역의 독일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뤼도와 재회한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순탄치 못한 사랑을 하던 두 사람은 노르망디 상륙작 전으로 프랑스가 해방된 후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노르망디의 연』은 1980년에 발표한 로맹 가리의 마지막 소설이다. 2차세계 대전 전후의 프랑스 노르망디를 배경으로 하여 뮌헨 회담, 독일의 폴란드 침공, 노르망디 상륙 작전, 파리 탈환 등의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외에도 삼촌 앙브루와즈와 레스토랑 주인 뒤프라의 우정, 타인에 대한 연민의 정과 인간의 존엄성 추구 등 작가가 추구하는 가치관이 드러나며 깊은 울림을 준다. ‘연’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희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데, 뤼도를 비롯하여 소설 속 인물들은 때로는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전쟁의 폭력성에 저항하며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꿈꾼다.
뤼도비크 플뢰리, 너를 위해 내가 걱정하는 오직 한 가지는 말이야 … 두 사람의 재회야. 어쩌면 그때쯤 난 이미 없을지도 몰라. 그래서 실망할 일을 면제받게 될지도 모르지. 프랑스를 되찾게 될 때면 우리의 상상력도 많이 필요할 테고 공상도 많이 필요할 거야. 네가 3년 동안 그토록 열렬히 줄곧 상상해온 그 아가씨를 다시 만나게 되면 …
온 힘을 다해 계속 그 아가씨를 만들어내야 할 거야. 틀림없이 네가 알았던 여자와는 아주 다를 테니까… 프랑스의 경이로운 귀환을 꿈꾸는 우리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훗날 종종 꺼림직한 웃음으로 실망감을 드러내게 될 거야. 저마다 다른 정도의 실망감을.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우리가 독일인들을, 심지어 나치들을 한껏 이용해 우리 자신을 가리려 한다는 깨달음이 불쑥 다가왔다. 오래전부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내 머릿속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걸 없애기가 아주 어려웠다. 어쩌면 결코 완전히 없애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나치들도 인간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들 안에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는 점이 바로 그들의 비인간성이었다.
“나는 앙드레트로크메 목사와 샹봉 쉬르 리뇽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쓰면서 이 이야기를 마침내 끝내려 한다. 더 잘 말할 수는 없겠기에.”
이 문장을 끝으로 소설은 끝난다. 그리고 몇 개월 뒤 로맹 가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