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밤 열 시 반』, 마르그리트 뒤라스
마리아 부부와 그들의 딸 그리고 마리아의 친구 클레르, 이들 네 사람은이 스페인을 여행하다가 폭풍우를 피해 들른 작은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그날 마을에서는 한 남자가 어린 아내와 그녀의 내연남을 권총으로 쏴 죽이는 살인 사건이 벌어졌고, 범인은 아직 잡히기 전이다. 폭풍우로 발이 묶인 관광객들로 호텔에 빈 방이 없어 마리아의 가족은 호텔 복도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알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마리아는 남편 피에르와 클레르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기류를 눈치챈다. 딸 쥐디트를 핑계로 두 사람을 의도적으로 피했지만, 마리아는 곧 그들이 함께 사랑을 나눌 것이라 예상하며 그들의 불륜을 상상한다. 남편 피에르도 마리아가 자신과 클레르의 관계를 눈치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인 사건의 범인 로드리고 파에스트라가 지붕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마리아는 모두가 잠든 새벽 그를 구출해낸다. 마리아는 로드리고 파에스트라를 마을 근처의 밀밭에 숨겨두고 그를 프랑스로 데려가고자 하지만 다시 찾아갔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은 로드리고를 발견한다. 마리아의 가족과 일행은 여행을 계속하여 마드리드에 도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 『연인』을 통해서 알려진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프랑스의 대표적 여성 작가, 프랑스의 가장 문제적 작가 등의 수식어가 붙어다니는 작가이다. 뒤라스는 소설과 희곡, 시나리오, 영화 연출 등 다양한 장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말년에 알코올 중독과 간경화로 고통을 겪었다. 뒤라스는 누보로망 계열의 작가로 평가받기도 하였지만, 그 자신은 어떤 문학 그룹에도 속하기를 거부하고, 자유로운 글쓰기를 통해 계속 독자적인 문학의 길을 모색해 나갔다.
『여름밤 열 시 반』은 3인칭으로 서술되기는 하지만 상황이나 사건의 전개가 마리아의 시선으로 받아들여지고, 마리아의 상상이 많이 드러나 있어 넓은 의미에서 1인칭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밤의 번개가 일으키는 명암의 대비나 황금빛의 밀밭에 내리쬐는 스페인의 강렬한 태양 등의 시각적인 표현과 현재형의 서술은 영화의 한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생생한 현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열 시 반, 마리아는 남편이 클레르와 어둠 속에서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러나 아내의 눈을 피하고 친구의 눈을 피한 두 남녀에게 ‘사랑을 위한 장소’는 없다. ‘호텔에 방이 없다’는 상황의 설정은 마리아와 피에르의 사랑도, 피에르와 클레르의 사랑도 온전한 의미의 사랑이 아님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방을 얻지 못한 남녀의 사랑은 완성되지 못하고 아침을 맞게 되는 것이다.
“어디나 모두 여름이다. 그들의 사랑을 위한 여름”이지만 그 사랑은 주인공 마리아가 아닌 남편과 친구의 것이다. 욕망으로 들끓는 피에르와 클레르의 모습은 번개가 번쩍거릴 때마다 드러난다. 남편과 친구의 모습을 발견한 그 자리에서 마리아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굴뚝에 달라붙어 있는 로드리고 파에스트라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마리아가 살인범 로드리고가 진심으로 살기를 바라고 그를 도와 프랑스로 가려고 하는 것은 바로 자신에 대한 연민과 자기애의 다른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과 상상이 뒤섞인 채로 묘사하고 진술하는 마리아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공허와 상념으로 상처입은 한 영혼을 이해하게 된다.
43. 밤 열 시 반. 그리고 여름.
그러고 나서 약간의 시간의 흐른다. 드디어 밤이 찾아온다. 그러나 오늘 밤 이 마을에는 사랑을 위한 장소는 없다. 마리아는 이 명백한 사실 앞에 눈을 내리깔고, 그들은 채워지지 않은 갈증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남겨질 것이다. 그들의 사랑을 위해 마련된 이 여름밤, 마을이 온통 가득 차 있는 것이다.
58. 한밤중의 그 순간이 다가왔다. 싫어도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내일이라는 날에 대한 피로감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다. 내일이 올 것을 예상하기만 해도 벌써 진절머리가 난다. 내일은 그들의 애정이 더욱 발전할 것이다.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158. 창문 너머의 풍경에는 엄격함이 누그러져 있다. 그는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태양은 약간 비스듬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올리브 나무들의 그림자가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동안 어느새 길어지기 시작했다. 더위가 약간 누그러진 느낌이다. 마리아는 어디에 있을까? 마리아는 죽을 만큼 마셔버린 것은 아닐까? 술과 죽음에 대한 터무니없는 욕망이 로드리고 파에스트라를 덩달아 흉내 내게 만들어, 그녀를 밀밭까지, 먼 길을 마다않고 장난기 섞인 기분으로 데려갔던 것은 아닐까? 또 한 여자, 마리아는 어디에 있을까?
159. 마리아는 밀밭에서 죽어버린 게 아닐까? 자신을 비웃다가 굳어버린 미소를 얼굴에 띤 채 누워 있는 것은 아닐까? 밀밭 속에서 혼자 흥겹게 웃는 마리아. 이 풍경은 그녀의 풍경이다. 올리브 나무들이 그림자에 살며시 다가오는 이 권태, 갑자기 더위가 누그러지고 석양으로 옮아가는 시간의 흐름, 도처에서 황급히 달려와 중천에 걸린 태양이 이미 쇠퇴기에 접어든 것을 알리는 여러 가지 조짐들 - 이 모두가 마리아에게 결부된 것들뿐이다.
170. “당신은 내 삶이야.” 그가 말한다. “한 여자의 단순한 새로움 같은 걸로 내 마음은 채워지지 않아. 당신 없이는 살아갈 수 없어.”
“우리 이야기는 끝났어.” 마리아가 말한다. “피에르, 이젠 끝났어.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이야.”
“아무 말 하지 마.”
“말하지 않을게. 하지만 피에르, 이젠 끝났어.”
피에르는 그녀 쪽으로 다가가서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싼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겁을 내면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
“언제부터?”
“방금 깨달았어. 어쩌면 오래전부터 그랬는지도 몰라.”